어느덧 2024년 파리 하계올림픽이 4일 남았다. 지난 도쿄 하계 올림픽은 코로나로 일부 선수들만 참가하게 되어 안타까움이 컸었기에 이번 파리 올림픽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이 여느 때 보다 클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러 걱정거리들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관심이 집중된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싶다. 얼마 남지 않은 파리 올림픽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올림픽에 대해서 알아보자.
올림픽이란
전 세계 각 대륙 각국에서 모인 수천 명의 선수가 참가해 여름과 겨울에 스포츠 경기를 하는 국제적인 대회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있는 국제 행사이다. 올림픽은 2년마다 하계 올림픽과 동계 올림픽이 번갈아 열리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감독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올림픽은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5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올림피아 제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19세기말에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영감을 얻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이를 위해 쿠베르탱 남작은 1894년에 IOC를 창설했으며, 2년 뒤인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렸다. 이때부터 IOC는 올림픽 운동의 감독 기구가 되었으며, 조직과 활동은 올림픽 헌장을 따른다.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올림픽 메달은 매우 큰 영예이며, 특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국가 영웅급의 대우를 받으며 스포츠 스타가 된다. 국가별로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 지급하는 포상금도 크다. 대부분의 인기 있는 종목들이나 일상에서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생활스포츠 종목들이 올림픽이라는 한 대회에서 동시에 열리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 출신의 선수들이 참여하는 만큼 전 세계 스포츠 팬들이 가장 많이 시청하는 이벤트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모든 종목 누적 시청자 수만 47억 명에 달하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인구가 시청한 이벤트였다. 또한 20세기에 올림픽 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IOC는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변화의 예로는 얼음과 눈을 이용한 경기 종목을 다루는 동계 올림픽, 장애인이 참여하는 패럴림픽, 스페셜 올림픽, 데플림픽, 10대 선수들이 참여하는 유스 올림픽 등을 들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IOC는 20세기의 변화하는 경제, 정치, 기술 환경에도 적응해야 했다. 그리하여 올림픽은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기대했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에서 벗어나서, 프로 선수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올림픽은 점차 대중 매체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올림픽의 상업화와 기업 후원을 놓고도 논란이 생겨났다. 또한 올림픽을 치르며 발생한 보이콧, 도핑, 심판 매수, 테러와 같은 수많은 일들은 올림픽이 더욱 굳건히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올림픽은 국제경기연맹(IF),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 각 올림픽의 위원회(예-벤쿠버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로 구성된다. 의사 결정 기구인 IOC는 올림픽 개최 도시를 선정하며, 각 올림픽 대회마다 열리는 올림픽 종목도 IOC에서 결정한다. 올림픽 경기 개최 도시는 경기 축하 의식이 올림픽 헌장에 부합하도록 조직하고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올림픽 축하 행사로는 여러 의식과 상징을 들 수 있는데 올림픽기나 성화가 그 예이다. 올림픽은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하계 올림픽은 33개의 종목과 약 400개의 세부종목에서 13,000 명이 넘는 선수들이 겨루고 그중 각 종목별 1, 2, 3위는 각각 금/은/동을 수여받는다. 전 세계 언론에서 각각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선수가 개인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와 더불어 올림픽 경기는 개최지와 개최국에게도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된다.
올림픽의 역사
고대 올림픽
고대의 올림픽 경기(올림피아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의 대표선수들이 모여 벌인 일련의 시합이었으며, 육상 경기가 주 종목이지만 격투기와 전차 경기도 열렸다. 그리고 패배하면 죽기도 하였다. 고대 올림픽의 유래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잘 알려진 신화로는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올림픽의 창시자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경기를 최초로 '올림픽'이라고 부르고, 4년마다 대회를 개최하는 관례를 만든 사람이 헤라클레스라고 한다. 어떤 전설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이른바 헤라클레스의 12 업을 달성한 뒤에 제우스를 기리고자 올림픽 경기장을 지었다고 한다. 경기장이 완성되자 헤라클레스는 일직선으로 200 걸음을 걸었으며, 이 거리를 "스타디온"이라 불렀는데, 후에 이것이 길이 단위인 '스타디온'(그리스어: στάδιον → 라틴어: 영어: stadium)이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올림픽 휴전'(그리스어: ἐκεχειρία 에케케이리아)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관념이 최초의 올림피아 경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올림픽 휴전'이란 어느 도시 국가라도 올림피아 경기 기간 중에 다른 나라를 침범하면 그에 대한 응징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올림픽 기간에는 전쟁하지 말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가 처음 열린 시점은 보통 기원전 776년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이 연대는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비문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비문의 내용은 달리기 경주 승자 목록이며 기원전 776년부터 4년 이후 올림피아 경기 마다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 고대 올림픽의 종목으로는 육상, 5종 경기(원반 던지기, 창던지기, 달리기, 레슬링, 멀리뛰기), 복싱, 레슬링, 승마 경기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엘리스의 코로이보스가 최초로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이라고 한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중요성을 띄고 있었는데, 스포츠 경기를 할 때는 제우스(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는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이 있음)와 펠롭스를 기리기 위하여 제물 봉헌 의식을 치렀다. 펠롭스는 올림피아의 전설상의 임금이었던 피사티스의 오이노마오스 왕과 전차 경주를 겨룬 영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올림피아 경기의 승자는 시와 조각상으로 칭송받았다. 올림피아 경기는 4년마다 열렸으며, 이 기간을 '올림피아드'(Olympiad)라고 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시간 단위로 이용하였다. 올림피아 경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범그리스 대회의 순환 대회 가운데 하나였다. 올림피아 경기는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그 후 로마가 패권을 잡은 뒤 그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고대 올림픽이 공식적으로 끝난 해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부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모든 이단 숭배 및 예배를 금지했던 393년을 고대 올림픽의 마지막이라고 추정한다. 다른 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의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모든 그리스 신전을 파괴하라고 명령한 426년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올림픽이 사라진 이후로 이보다 한참 뒤인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올림픽 경기가 열리게 된다.
근대 올림픽
고대 올림피아 경기를 제대로 구현한 최초의 시도는 혁명 시대의 프랑스에서 1796년부터 1798년까지 3년동안 실시했던 프랑스 국내 올림픽인 '공화국 올림픽'(L'Olympiade de la République)이었다. 이 대회의 종목 중에는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경기 때 행한 일부 종목도 있었다. 특히 1798년 공화국 올림픽 대회는 미터법을 최초로 스포츠에 도입시킨 대회이기도 하다. 이후 52년 뒤인 1850년에는 잉글랜드 슈롭셔주의 웬록에서 올림픽급의 대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는 1859년에 아테네에서 열렸을 때 웬록 올림픽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지금도 열리고 있다. 브룩스 박사는 1859년에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의 내용을 이후 경기에 채택하였다. 1866년 런던의 수정궁에서는 윌리엄 페니 브룩스가 영국의 국가 올림픽 대회를 만들었다. 1821년 그리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때부터 올림픽 부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시인이자 신문 편집자였던 파나요티스 수초스(Παναγιώτης Σούτσος)는 1833년에 출간한 자신의 시 '망자(亡者)의 대화'에서 최초로 올림픽 부활에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리스의 부유한 박애주의자였던 에방겔리스 자파스(Ευαγγέλης Ζάππας)는 1859년에 아테네 시 광장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일명 자파스 올림픽)"를 후원하였다. 이 경기에는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출신의 선수들이 참가하였다. 에방겔리스 자파스는 이후에도 올림픽 경기를 개최할 수 있도록 고대의 경기장이었던 파나티네코 경기장을 복원하는 데도 돈을 썼다. 파나티네코 경기장에서 1870년과 1875년에 자파스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현대 올림픽인 2004년 하계 올림픽 때는 양궁 경기장으로도 쓰였다. 역사학자였던 쿠베르탱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면서 군사들이 체계적인 체력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말한 인물이다. 1890년 웬록 올림픽에 참석한 쿠베르탱은 그 이후부터 올림픽을 대규모로 부활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쿠베르탱은 웬록 올림픽과 자파스 올림픽을 토대로 하여 올림픽 경기를 국제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나라별로 올림픽을 번갈아가며 개최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는 이 방안을 새로 설립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첫 올림픽 의회 기간 중에 언급했다. 총회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1894년 6월 16일부터 6월 23일까지 7일간 지속되었으며, 총회 마지막날, 2년 후인 1896년에 아테네에서 국제적 규모의 올림픽 대회를 열기로 결정되었다. IOC는 올림픽을 조직하는 데에 모든 책임을 졌으며, 초대 위원장으로는 그리스의 작가였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Δημήτριος Βικέλας)가 선출되었다.
2024년 파리 올림픽 관련 이번 글에서는 올림픽과 올림픽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올림픽의 종류와 파리 올림픽에 대해서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