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三一節,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은 대한민국의 국경일로,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음력 1월 29일 토요일) 당시 한반도의 민중들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 항거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다.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매년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하여 국경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 제1호를 통해 3월 1일을 '대한민국이 부활한 성스러운 날(성일, 聖日)'로 규정하고 축하할 것을 주창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에는 미군정 군정 법률 제2호를 통해 '국가경축일'로 지정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통해 계승되었다.
3.1 절의 의의
1948년 제헌 이래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에서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친일재산귀속법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리면서 그 사유로 3.1 운동의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함이라고 판시한 데서 알 수 있듯, 3.1 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건국 정신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민주공화국의 체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됐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의 헌장과 강령, 헌법 등이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통해 계승되어 오늘날 헌정의 뿌리가 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출발일로서 국가가 축하하는 것이다. 광복절이 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삼일절과도 관련이 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민주주의 제도의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삼일절은 독립운동가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날이면서 대한민국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공공기관에서마저 삼일절을 "순국선열을 추도,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는 날"이라며 잘못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해당 문장은 두산백과의 구 삼일절 문서에 기술되어 있었으나, 2021년을 기점으로 정정됐다.
3.1 절의 역사
삼일절 며칠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빈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고 잡혀갈 예정이었으므로, 백업 요원으로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다만 여기에는 14인설과 16인설도 있으며 정노식을 제외하느냐, 김세환을 추가하느냐에 따라서 나뉜다. 결과적으로 실제 시위를 이끈 15인을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이 중 서너 명은 훗날 친일로 변절하게 되지만, 나머지 인원은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구체적으로 33인 중 3인인 박희도, 정춘수, 최린이 변절한 사람들이고, 48인 중에서는 최남선이 포함되어 4인이 된다. 이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서다. 삼일절의 역사는 독립 선포 후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다. 1920년 2월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령 1호를 통해 3.1 독립 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발족하고 성대한 식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3월 1일 당일 상하이시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태극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정부 차원의 경축식은 오전 10시에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당일 오후 2시에는 대한교민단이 주최하는 삼일절 축하회가 성대히 열려 여운형 교민단장의 연설과 이동휘, 안창호의 축사, 중국 남녀 학생들의 축하무를 아우르며 오후 4시 반 기념행사가 끝이 났다. 이와 동시에 한인들은 상하이 시가지에서 일본총영사관 앞까지 태극기를 들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와 국내 주요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쿠바, 심지어는 일본 등 각국의 도시에서도 치러졌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시에서 300인의 한인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단 차량과 간호복을 입은 여성,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부대가 시가행진을 벌였다. 해외에서의 삼일절 행사는 강당이나 운동장, 교회 등을 빌려 여는 경축대회와 태극기와 깃발, 전단을 휘날리는 기습 시위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중국과 미주, 연해주에서, 후자는 주로 일본 유학생들이 자주 행하던 방식이었다. 상해에서 치러졌던 삼일절 경축식의 경우, 올림픽대극장이나 침례교당 등지를 빌려 만국기와 태극기로 장식을 하고 군악대를 초청하여 독립군가와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서 치러졌다. 식전이 끝난 뒤에는 차량을 빌려 태극기와 독립기를 달고 악대를 앞세워 일본 영사관까지 가두행진을 하거나 축하연회, 기념연극 등을 베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대만, 필리핀, 인도, 베트남, 몽골 등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족 독립운동 대표단이 식전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반제국주의 연대를 확인하기도 했다. 상해 이외의 지역의 경우, 쿠바에서는 대포를 빌려 삼일절 식전 전에 21발의 예포를 쏘기도 했고, 1942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한인들의 군사 조직인 한인경비대가 이 날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1920년부터 사용되었으나,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명칭은 독립선언기념일이었으며, 때때로 독립기념일, 국경일로 불리었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Fourth of July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20년부터 공휴일로 삼았다. 한편 임시정부 시기 독립운동가들과 해외 교포들은 삼일절을 대한민국 건국기념일로 인식하였는데, 1920년 포암 장병준 선생이 국내에 잠입해서 살포한 전단 〈대한독립1주년축하경고문〉에 3월 1일이 건국의 기념일로 언급되어 있었으며 이 날을 대한의 자유독립을 선언한 이래 1주년 되는 첫 생일로 민족이 영원히 기념할 축일로 명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외에도 미주 지역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The New Korea)〉의 경우 삼일절을 Korean Independence Day로, 기념의 대상을 3.1 운동과 대한민국 수립으로 언급한 바 있으며, 1943년 주미외교위원부가 미국 상원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3월 1일에 세계의 한국인들이 한국 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수립, 임시정부 창립을 기념했다는 내용이 담겨 삼일절이 당대 한인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간주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천장절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피난을 함에 따라 성대한 식전은 치르기 어려워졌으나 간소하게나마 경축식을 이어나갔고, 중국 측 언론에서도 삼일절을 한국 혁명기념일로 표현하는 등 명실상부한 한인의 국경일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주의원에서 3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하였으며,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다만 광복 직후 삼일절은 좌우익 대립의 장으로 대두되고는 했는데, 국가 건설의 정통성을 3.1 운동에 두려는 좌파와 우파가 서로 대결함에 따라 경축식이 개별적으로 열리는 것은 물론 상호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때문에 1940년대 당시 3월 1일이 다가오면 경찰들은 신경을 곤두섰다고. 다만 삼일절 경축 공연이 곳곳에서 열리는 등 축하 행사도 함께 이루어져 문화생활에 갈증을 느끼던 당시 민초들의 욕구를 충족해 주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된 후 삼일절은 4대절에 포함되었으며, 대한민국 건립의 시원이 된 최대의 국경일로 간주되었다.
3.1 절 노래
정인보 작사/박태현 작곡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3000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