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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경희궁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2

by 또바기벗 2023.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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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전>

 이번에는 경희궁 내 건축물인 자정전과 태령전에 대해 알아보겠다.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이다. 경희궁 정전 숭정전의 바로 북쪽 뒤편에 있다. '자정(資政)' 뜻은 '정사(政)를 돕는다(資)'이다. 그리고 태령전은 경희궁에 있는 어진 봉안소, 즉 진전(眞殿)이다. 자정전의 서쪽에 있다. 정조는 《경희궁지》에서 태령전을 “자정전 서쪽에 있으며 임금님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다.”라고 소개했다.

경희궁 내 건축물 자정전의 역사와 구조

자정전의 역사 :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편전으로 처음 사용한 시기는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불타자 인조가 경희궁을 사용하면서 그때 비로소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빈전으로 주로 사용했고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숙종, 영조 연간까지 활발히 사용되었으나 정조 이후부터는 사용이 뜸해졌으며 순조가 간간히 이용할 뿐이었다. 빈전으로서의 사용이 빈번하고 접근성의 문제도 있어서, 조선 후기에는 내전과 가까운 흥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1865년 고종 때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 공사의 자재로 썼다. 이때 자정전도 철거했다. 흔히 일제가 없앴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자정전의 위치와 용도 : 자정전은 경덕궁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 북쪽에 있으며 경덕궁의 지리상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광해군이 영건한 경덕궁에는 편전이 두 개 있다. 바로 자정전과 흥정당이다. 자정전은 정전의 뒤쪽에 위치하고 대외적인 의례와 관계되는 편전이라면, 흥정당은 침전인 융복전(隆福殿)과 회상전(會祥殿)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왕이 편안하게 신하를 만나고 경서를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경덕궁을 자주 활용한 왕은 인조와 숙종, 영조였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이 소실되자 경덕궁을 사용하였다. 주로 1624년(인조 2)부터 10년 동안 자정전에서 오전 다섯 시에서 일곱 시[卯時]까지 조강(朝講)을 행하고, 오전 열한 시에서 오후 한 시[午時]까지 주강(晝講)을 하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또 1625년(인조 3)에는 경덕궁 경현당(景賢堂)에서 원자의 관례를 행하고 자정전에서 왕께 조알(朝謁)하는 의례를 행하였다(『인조실록』 3년 1월 21일). 숙종과 영조가 경희궁에서 승하하자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에서 빈전 의례를 행하였다. 숙종은 죽기 전에, 빈전은 창덕궁의 선정전에 마련하고 혼전은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에 마련하도록 하명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경희궁에서 승하하여 시신을 창덕궁까지 옮기기 어려워 경희궁의 자정전에서 빈전 의례를 행하였다. 숙종이 경덕궁의 정침인 융복전에서 승하하자 융복전에서 시신의 사후 처리 과정으로 소렴(小殮)을 마쳤다. 5일째 되는 날 빈전으로 선정된 자정전에서 대렴(大殮)을 행한 후 자정전에 빈소를 차렸다. 시신을 담은 재궁(梓宮)은 일영문(日永門)을 통해 융복전을 나와서 서쪽에 위치한 집경당(集慶堂) 대청을 가로질러 그 뒤에 청상문(靑商門)을 지나 자정전으로 오르는 계단형 행각을 거쳐 숙성문(肅成門)에 이르러 자정전에 들어갔다.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묘사된 청상문(淸商門)과 숙성문(肅成門) 사이는 매우 가파른 지형이며 계단형 행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빈전의 정전은 자정전으로 하고, 그 동북 행각에는 대비전(大妃殿)의 곡림청이 위치하였다. 서북 행각에는 대전(大殿)의 곡림청을 두고, 대비전 곡림청의 남쪽에는 중궁전의 곡림청을 마련하였다. 빈전 주변으로 대비전과 대전의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덕유당(德游堂)은 대비가 머물고 읍화당(浥和堂)은 왕이 사용하였다. 당시 연잉군으로 있던 영조는 숭정전의 서월랑에서 직숙(直宿)하였다. 5개월 동안의 빈전 의례를 마치고 발인할 때에는 재궁을 윤여(輪輿)에 태워 숭정전까지 온 뒤 발인을 위한 곡림 의례를 행한다. 그 후에 숭정문(崇政門)에서 견여(肩輿)에 태워 흥화문(興化門) 밖까지 이동하고 흥화문에서 대여(大輿)에 태워 산릉으로 옮겨졌다. 이외에 자정전은 우주(虞主)나 연주(練主)등의 신주를 만들어 봉안하는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연주(練主)와 현종의 우주(虞主)를 자정전 월랑에서 조성하고 자정전에 봉안했다가 연제사(練祭祀)를 지내는 당일에 창경궁의 문정전으로 옮겼다. 1681년(숙종 7)에는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우주를 자정전 월랑에서 조성하고 읍화당에 봉안하였다. 또 인경왕후의 연주를 조성하고 봉안하였다. 1688년과1725년(영조 1)에도 비슷한 사례가 보인다.

자정전의 구조 : 2단의 돌로 만든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1층 목조 전각이다. 경희궁 자체가 원래 이궁으로 잠시 머물 목적으로 지은데다 산자락이란 지형의 한계 때문인지 조선 궁궐의 편전 중 규모가 제일 작은 편이다. 단적으로 선정전, 문정전과 같은 측면 3칸이지만, 선정전은 가운데 칸에 문짝이 4개 달려있고 좌, 우칸으로 문짝이 3개다. 문정전도 규모가 작고 측면 가장자리 칸의 문짝이 각각 2개 달려있지만 가운데 칸의 문짝이 4개이다. 그런데 자정전의 측면은 가운데 칸과 좌, 우 가장자리 칸의 문짝이 다 2개씩 달려있다. 하지만 산자락의 지형을 역이용해 기단을 높임으로써 오히려 편전의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다른 궁궐의 편전들은 전부 1단이지만 자정전은 2단이다. 물론 윗 단과 아랫 단의 높이 차이가 좀 있어 실제로는 1단 반으로 봐도 될 정도이다.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과 달리 내부의 옥좌 및 당가는 복원되지 않았고 바닥도 전돌이라 신발을 벗고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정문 자정문은 자정전과 일직선 상에 있지 않으며 자정전보다 더 서쪽에 있다. 이 역시 지형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자정문의 동쪽 칸과 자정전의 서쪽 칸이 마주보고 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궁궐의 편전과 마찬가지로 혼전/빈전의 기능을 주로 맡았다. 이에 따라 혼전/빈전에 설치하는 복도각을 설치했다. 여기서 복도각은 혼령이 드나드는 길이란 의미를 가진다. 고종 시기 자정전을 철거할 때 같이 헐었다. 2001년 자정전 본전을 복원할 때 같이 짓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른다. 자정전 서쪽 측면 출입문과 붙어있는 복도각 아래에 실제 조선시대 당시의 전돌 유구를 발굴하여 보존 중이다.

경희궁 내 건축물 태령전의 역사와 구조

태령전의 역사 : 원래 이 일대에는 상례 공간이었던 읍화당(挹和堂)이란 건물이 있었다. 읍화당은 1731년(영조 7년)까지 기록에서 존재가 확인되나 그 이후 역사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태령전이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1744년(영조 20년) 8월 20일 자 《영조실록》 기사이다. 저 때 중수했다는 내용인데, 이로 미루었을 때 읍화당을 고쳐짓고 태령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는 평생에 걸쳐 총 13점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중 7점을 태령전에 봉안했다.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태령전과 그 일대를 영조의 장례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혼전을 이곳에 두었고 태령전 근처에 재실 도수연을 세웠다.또한 정조 자신이 머물 여막을 태령전 남쪽 행각에 두었고 인산 날 여기서 망곡례를 행했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사망한 문효세자의 혼궁을 이곳에 두고 일종의 위령제인 재우제(再虞祭)를 지냈다. 1836년(헌종 2년)에는 종묘의 영녕전을 증축공사하면서, 잠시 제1실 ~ 제8실에 있던 신주의 일부를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이후 태령전 자리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서울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80년대에 서울고등학교가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사간 후 서울특별시와 문화재청에서 2001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태령전의 구조 : 산 자락에 자리잡은 지형의 특성상, 기단을 두 단으로 쌓았다. 아랫단은 장대석을 세 벌 쌓았고 윗 단은 두 벌을 쌓았다. 계단은 정면에 윗 단 3벌, 아랫 단 3벌을 합쳐 총 6벌이 놓여있고, 측면에는 윗 단 1벌, 아랫 단 1벌을 합쳐 총 2벌이 놓여있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두고 틈새를 벽으로 막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다. 3면이 전부 띠살 창호로 된 문으로 되어 있다. 문 위엔 교창을 두었다. 뒷면의 경우만 다른데 양 끝 가장자리 칸은 문을 달았으나 가운데 3칸에는 중인방을 두고 그 위, 아래를 벽으로 마감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총 10칸으로 실내는 전부 뚫려 한 공간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하여 2001년 복원한 후 이 곳에 영조 어진의 모사본을 전시 중이다. 훼손을 막기 위해 사방을 유리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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