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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경희궁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1

by 또바기벗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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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문>

이번 글에서는 경희궁 내 건축물 중 홍화문과 숭정문 그리고 숭정전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흥화문(興化門)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년)에 세운 경덕궁(현재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와 향이 다르게 남향으로 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숭정문(崇政門)은 경희궁 정전의 정문인 만큼 공적인 사용 빈도가 높은 문이었다. 형태 또한 궁궐 안에 있는 어떤 문보다 아름답고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 부속된 정문이 근정문, 인정문, 명정문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문 또한 정전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고 액호의 가운데에 정치한다는 뜻의 ‘정(政)’ 자가 들어있다. ‘숭정(崇政)’에는 정사를 드높인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어 이 공간에 서면 나라를 다스릴 때 겸손한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는 면려가 담겨있다. 이 문에서 경종과 정조·헌종이 즉위하였다.

숭정전(崇政殿)은 원래 경희궁의 정전이었다. 경희궁은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즉위 9년인 1617년에서 1620년 사이에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이라 불렀던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5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정전이다.

경희궁 내 건축물 흥화문의 역사와 구조

흥화문의 역사 : 흥화문은 1618년(광해군 10년)에 경덕궁(현재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이후 경희궁에 크고 작은 화재들이 일어났음에도 흥화문은 건재하여 약 300년 간 그 자리를 무사히 지켰다.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겼다가 1932년에는 장충동 박문사에서 사들여 정문으로 사용했다. 그 후 박문사에 영빈관과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흥화문의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애초에 일시적으로 화재나 유행감염병 등을 피할 때 잠깐만 거처할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흥화문의 초석과 기둥은 원형이며, 가운데 기둥 열 3칸에는 문짝을 달았다. 문틀 위에는 홍살을 달았고,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연등천장, 좌우 협간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 · 용두 · 잡상 등이 올려져 있다.

경희궁 내 건축물 숭정문의 역사와 구조

숭정문의 역사 : 1617년(광해군 9년)에 경희궁 창건 당시에 착공하여 1620년 연간에 완공했다. 이후 여기서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하는 조참, 과거합격자들의 시상, 외국 사신 접견 등 많은 행사를 거행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들이 불탔으나 숭정문은 숭정전과 함께 다행히 피해를 면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때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 자재로 쓰였다. 경희궁에는 건물 10여 채 정도만 남았는데 숭정전과 숭정문도 그 중 하나였다. 경희궁 영역에는 창고와 양잠소가 들어섰는데 이때 세운 곡식 창고를 숭정문 밖에 두었다. 그나마도 1889년(고종 26년)에 숭정문의 일곽이 화재를 당해 곧 재건했는데, 1900년 경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엔 숭정문과 행각이 없는 것을 보아 이마저도 그 사이에 철거한 듯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숭정전과 숭정문 언저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가 들어섰다. 8.15 광복 이후에도 경성중학교가 서울 중,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학교 자체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서울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워 서울고등학교를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91년 복원했고, 1993년과 1994년에는 행각 공사까지 완료하여 오늘에 이른다. 

숭정문의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며 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3] 지형이 높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굉장히 넓은 월대를 두 단이나 쌓았으며 그래서 위압감 하나만큼은 다른 궁궐의 정전 정문들을 압살 한다. 아래 월대의 계단은 9단이고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 앞에 서수를 두 마리 놓았으나 답도는 놓지 않았다. 그러나 5단의 계단이 설치된 윗 월대에는 서수는 물론, 쌍용이 그려진 답도를 설치했다.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했다. 공포는 다포 양식으로 했고 어칸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3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협칸에는 각각 2개의 주간포를 얹었으며,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로단청[4]으로 했으며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숭정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면 8칸, 측면 2칸의 행각이 뻗쳐 있고, 가장자리 쪽 2칸은 다른 칸보다 폭이 좁다. 행각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숭정전 좌, 우의 행각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방과 월랑이 혼합된 형태의 행각으로, 예문관 · 무예청 · 선전관청 ·향실 등의 관청과 숭정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벽체 없이 복도로만 뚫려있다. 그리고 행각 사방마다 문이 있어 통행을 자유롭게 했는데, 남행각엔 바로 이 숭정문, 동행각과 서행각엔 여춘문과 의추문, 그리고 북쪽 행각에는 편전인 자정전의 정문 자정문이 있다.

경희궁 내 건축물 숭정전의 역사와 구조

숭정전의 역사 :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 사이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이후 약 240여년 간 조선 후기 동안 사실상 정궁[2]인 창덕궁의 인정전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는 공간으로 쓰였다. 경종, 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인 회상전(會祥殿), 융복전(隆福殿) 등은 불탔으나 숭정전은 피해를 면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 건물 대부분을 헐어갔기 때문에 경희궁은 궁궐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은 철거되지 않았지만, 숭정전 마당에 있는 박석과 계체석 등은 헐려 광화문 공사에 쓰였다. 그런 상태로 여러 해 동안 방치되면서 숭정전 일대는 거의 폐허처럼 변했다. 대한제국 수립 후 당시 황궁이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근처에 있어 경희궁에서 주요 국가 행사를 치르기도 했는데 이때 숭정전의 문과 벽을 제거하여 장대로 개조했고, 군사 훈련 등을 참관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나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 한 뒤, 경희궁은 다시 버려졌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에 일제는 숭정전과 그 인근에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세웠다. 숭정전은 한동안 제자리에 있었는데 1926년에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에 매각되어 법당으로 바뀌었고, 기존 숭정전 자리에는 학교 식당이 들어섰다. 광복 이후 조계사 터에 동국대학교 건물들이 들어섰고, 원래 건물은 1975년부터 1976년 사이에 보수 공사를 거쳐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각원으로 용도가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이후 본 건물의 이야기는 정각원 문서 참조. 서울특별시에서는 1974년 1월 15일에 옛 숭정전 건물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했다. 광복 이후에도 경성중학교가 서울 중,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학교 자체는 주욱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우고 서울고등학교를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91년에 복원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주변부까지 복원을 마쳤고 이후 시민에게 개방해 오늘에 이른다. 당초 복원 당시에는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을 옮겨오려 했으나 부재들도 낡은데다 내부 변형이 너무 심해 그냥 놔두고, 대신 그대로 본뜬 새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숭정전의 구조 : 

다른 궁궐들처럼 행각 주위 4면에 문을 두었는데, 남쪽에는 숭정문, 동쪽에는 여춘문, 서쪽에 의추문, 북쪽에는 후전인 자정전의 정문인 자정문이 있다. 내부 천장은 우물반자를 꾸며 화려한 용(龍)무늬 단청을 그렸는데, 경희궁 창건 당시 법궁이던 창덕궁의 인정전에도 격이 약간 낮은 봉황이 달린 것을 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현대에 숭정전을 복원할 때 이 용도 정각원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복원했는데, 새로 만든 용 조각이 장난감같이 조잡해서 논란이 인 적이 있었다. 천정의 그림과 다른 조형물 또한 원형과 전혀 다르다. 건물 4면에는 꽃살분합문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내었는데, 어칸에는 4짝, 그 옆 협칸에는 3짝, 그리고 가장 양 끝칸인 툇간에는 2짝 문으로 나 있다. 내부 천장은 소란반자이다. 공포는 외부로는 창방 위에 외2출목의 쇠서와 교두형 첨차를 두어 다포계의 특징을 보이면서 기둥 위에만 짜여 있다. 간포(間包) 대신 화반을 두고, 공포 내부에 출목 없이 양봉형(樑奉形)으로 보아지를 마련하여 보를 받치는 점은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건물 앞에 놓인 계단 역시 다른 궁(宮)의 정전과 같이 삼도(三道)로 꾸며 중앙에는 봉황 1쌍을 양각하여 장식했다. 1990년대에 숭정전 일곽을 복원하면서 조정 뜰에 품계석을 세워두었다. 그런데 정작 조선시대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 포스팅에 따르면, 품계석은 법궁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경복궁, 창덕궁(경복궁 중건 이전 조선 후기 사실상 법궁), 경운궁(대한제국 광무 연간 법궁) 조정에만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과 대한제국 시기에 촬영한 경희궁 사진에서 품계석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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