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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경희궁의 역사와 건축물

by 또바기벗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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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전경>

 

 경희궁(慶熙宮)은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렸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경희궁에는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 부지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경희궁의 역사

조선후기 경희궁의 역사 :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2]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과 철종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고종 즉위 직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철거 : 그동안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최근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가 아닌 조선 말기에 경희궁이 대거 훼손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 도시전설에 가까운 얘기로 치부되었지만, 최근에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사실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학계를 제외하면 어떠한 대외적인 자료에도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아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경희궁이 일제에 만행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65년(고종 2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고종 5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한 후 경희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했고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성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는 1883년(고종 20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와 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의 경희궁 역사 :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중학교(후 경성중학교)가 들어서서, 숭정전을 포함한 일부 전각들이 학교 부지로 사용되었다. 1920년대에는 건물들이 매각되었다.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의 한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되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회상전은 1911년부터 10여년 동안 일본인의 학교였던 경성중학교의 기숙사(교원 양성소)로 쓰였다. 1928년 회상전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찰에 매각되었다가 1930년 화재로 소실된다.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되었으며, 관사대(觀射臺)는 사직단 뒤로 이건되어 현재 황학정(黃鶴亭)으로 쓰이고 있다.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쓰였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폐사되고, 이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지금의 위치(계양문:남문)로 다시 옮겨졌다. 본래의 위치는 구세군회관 자리이다. 1922년에는 경희궁 동쪽 부지에 조선총독부 직원 관사가 들어섰다. 북서쪽에는 1932년 경성측후소가 건설되었고, 1940년대에는 대동아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공호가 숭정전 동쪽 행랑에 건설되었다.

광복 이후 경희궁의 경사 : 경희궁터는 광복 후에 서울중ㆍ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78년에 현대건설이 부지를 구매하여 사옥을 조성하려 하였으나, 공원 녹지를 조성해야한다는 여론에 서울특별시가 재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다. 이후 복원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그러나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비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복원공사는 중지되었다. 시에서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다시 훼손되었다. 창건당시의 경희궁 규모는 무덕문지(북문)의 유구가 발견된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을 모두 경희궁에 지었으며,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도 포함된다. 2013년 1월, 서울특별시청과 종로구청은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제출된 계획은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공동으로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경희궁 2차 복원이 진행되는 것을 소재로 하였다. 정문인 흥화문을 원위치로 복원하고, 방공호를 철거한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 또한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을 철거한 후 흥정당을 복원하며, 현재 성곡미술관 주변에 남아있는 궁장을 포함하여 경희궁 궁장이 일부 복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단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이전과 궁지 내 민간 건물 매입이 추진된다. 2016년 11월에 서울시립미술관을 철거하였으며,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을 과거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던 위치에 새로 조성하고 기존 주차장 자리는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경희궁의 건축물

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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