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좋았던 곳들은 아이와 꼭 다시 찾는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갔던 우리 옛돌박물관이 그랬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볼거리가 풍성했고,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트린 나무들이 하루하루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듯했다. 마침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의 전시도 열리고 있었는데, 그 현란한 색채를 마주한 순간 “아이들이 보면 참 좋아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박물관을 재방문했다. 아이와 함께 한 박물관은 또 다른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걸음마다 말을 거는 듯한 옛돌 박물관
우리 옛돌박물관의 시작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한다. 고서화에 빠져 인사동을 드나들던 한 기업인 눈에 일본인이 수십 점의 석조유물을 두고 상인과 흥정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골동품 시장을 통해 빠져나간 우리네 문화재가 상당했다. 분노한 그는 사재를 털어 일본인이 탐냈던 석조유물을 덥석 구입했다. 그렇게 집 한구석을 차지하게 된 옛돌이 보면 볼수록 아름다웠다. 보는 각도에 따라, 때론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매력이 배어났다. 그날부터 돌장승과 석등, 석불, 석탑, 문인석, 무인석, 맷돌까지 하나둘 수집하다 보니 어느새 박물관 하나를 가득 채웠다. 지난 2000년 경기도 용인에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유물 전문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던 이곳은 2015년 서울 성북동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박물관이라는 다소 딱딱한 이름을 붙이긴 했으나 실제 소장품 대부분은 야외에 전시돼 있다. 커다란 석호 한 쌍이 반겨주는 입구를 들어서면 ‘바다를 건너온 돌사람’이란 제목의 환수유물들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기 전시된 문인석과 장군석, 비석받침 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밀반출된 유물들이었다. 그러나 이곳 박물관의 오랜 노력 끝에 조선의 석조유물 다수를 소장하고 있던 일본인 쿠사카 마모루가 기증을 결심, 무려 70여점의 우리 문화재가 바다를 건너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어 매화가 활짝 핀 ‘승승장구의 길’, 부처의 오묘한 미소를 돌에 새긴 ‘염화미소’, 주로 왕릉이나 사대부 묘를 수호하기 위해 세웠던 늠름한 장군석 수십 점이 모여 있는 ‘무인시대’ 등이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아이의 흥미를 잡아끌었던 건 수세식 화장실의 화강암 판석이었다. 용도가 분명하지 않아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이 판석은 2017년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통일신라 초기 수세식 화장실 유적이 발견되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형이자 민씨정권의 주요 인물이었던 흥인군의 묘를 지키던 문인석과 신도비, 망주석을 지나면 낭만적인 ‘제주도 푸른 밤’이 펼쳐진다. 투박하지만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서민의 정서를 표현한 동자석과 제주만의 독특한 대문양식인 정낭이 반갑게 맞아준다. 그 아래에는 만개한 벚꽃과 노란 산수유, 직접 만져볼 수 있는 다양한 표정의 벅수가 있는 ‘오감만족’이 자리한다. 박물관에서 가장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는 곳으로 성북동 일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우리 옛돌박물관 실내전시장은 벅수관과 동자관으로 구성된다. ‘벅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장승을 일컫는 순우리말로, 나무장승은 비바람에 쉽게 썩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전승되는 돌장승을 선호했단다. 사람 얼굴을 한 장승을 마을 입구에 세워두면 전염병을 가져오는 역신이나 잡귀를 막아준다고 믿었는데, 자연스레 그 생김새와 표정에 지역의 특징이 드러난다. 아이는 모양과 얼굴이 제각각인 벅수들 틈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발견하고는 “이 벅수는 외계인 닮았어요!”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동자석’은 16~18세기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왕실과 사대부 묘역에 조성된 석물이다. 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제작돼 엄숙한 묘역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초기엔 불교의 동자상처럼 장식적인 표현이 두드러졌으나 서서히 단정하고 담백한 유교적 특징을 갖게 됐다. 이곳 박물관에서는 부귀와 수호, 다산 등 동자석이 지닌 다양한 의미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화려한 그래피티가 펼쳐지는 뮤지엄웨이브
그래피티 개념을 전혀 모르던 아이도 “이건 꼭 낙서 같아요” 단번에 알아본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낙서처럼 끄적인 그림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아이에겐 신선한 경험이다. 그래피티를 공공시설을 훼손하는 행위로 인식했던 어른들이라면 오히려 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짜릿한 반전을 마주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샤넬과 에르메스, 마세라티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와 협업할 만큼 문화적 슈퍼스타로 꼽힌다. 이들 결과물 또한 뮤지엄웨이브에서 만날 수 있다. 1층 입구에는 그래피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락카 스프레이와 그래피티용 펜 등 난생처음 보는 도구들로 그림을 그리는 재미에 아이는 여기서만 한참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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