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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한국 관광지 100선 6 - 수도권지역 < 수원 화성 >

by 또바기벗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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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

 수원화성(水原華城)은 조선 정조 시기에 지은 수원시의 성곽 건축물과 이를 중심으로 한 계획도시이다. 오늘날에도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차례의 자연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것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나, 수원화성은 19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설계도와 작업 진행기록이 모두 남아있는 덕분에 현대에 이르러 유지보수를 해도 세계유산 자격을 그대로 유지가 가능하다. 한마디로 유지보수가 가능한 세계기록유산이다.

수원 화성의 명칭

 정식 명칭은 수원화성(水原華城)으로, 약칭으로 수원성(水原城), 또는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화성이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지만, 이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역사적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때도 수원화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수원군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름만 따서 이렇게 된 것이다. 실제로 시와 군이 분리될 경우, 특히 그 군의 전통적인 중심지가 분리될 경우 지명으로 시 지역과 군 지역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기존 지명에서 한 글자를 바꾸거나(청주시 - 청원군 등), 고지명(충주시 - 중원군 등) 혹은 유적 이름(경주시 - 월성군 등)을 쓰는 방식을 썼다. 다만 전통적인 중심지가 아닌 곳이 시로 분리되는 경우 시 쪽이 새 이름을 지었는데 대개 시가 될 지역의 읍면명을 땄다(사천군 - 삼천포시 등). 실제로 수원과 화성은 같은 고을로 수원화성 축조 전까지 수원부(수원도호부)의 원래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는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일대였으나 바로 이 곳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조성하면서(현륭원, 현재의 융릉) 기존 읍치를 밀어버리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읍치를 이전한 것이다. 또한 수원부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華山)'은 수원 고을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를 본따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짓게 된 것이다. 1793년 수원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부사를 '화성유수(留守, 오늘날의 수원시장)'로, 수원도호부(수원부)를 '화성유수부(화성부)'라 불렀다. SBS 드라마 은실이에서는 이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상의 행정구역 화산군이 등장한다. 정조가 장자의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에서 따서 이름지었다고도 한다. 이 내용은 화성시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것인데, 화성시에서 수원화성이 시명의 유래라고 명시하지만 않았을 뿐, '수원부 읍치와 현륭원을 위호 할 성곽의 터를 둘러보면서'라는 내용이 앞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성곽이 바로 수원화성임을 알 수 있다.

수원 화성의 역사

건축 배경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며 철저하게 서로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주었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9]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이 두 가지가 존재한다.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은 바로 이들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인 셈이다.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10]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다. 성벽의 길이로 따지면 한양도성의 총 길이가 약 18.6㎞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총길이가 약 5.5km이다. 또 화성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 이 시기에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 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리 일대에서 수원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고, 더군다나 조선의 도로사정은 상당이 좋지 않았다.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남한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성전 장소

 수원화성은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마지막 공성전이 벌어진 장소다. 그것도 현대전이었다. 이전 성들과는 달리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지만 정작 조선시대 내내 수원화성이 실전에서 방어에 활용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에서도 비껴갔고 구한말 의병들은 일본군 상대로 게릴라전 형태의 투쟁을 했기 때문에 공성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수원화성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어용으로 쓰이게 된다. 문제는 수원화성은 처음 쌓을 당시 기준에는 가히 우주방어급 요새로 지었지만 한국전쟁은 20세기 중반에 벌어진 전쟁이었으며,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요새는 물론이고 같은 철판으로 두른 전차까지 뚫는 화포 앞에서 고작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수준에 지나지 않던 수원화성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제도 태평양 전쟁 말기 북한산성과 더불어서 수원화성에도 대공포를 설치하고 요새화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둘 다 현대전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 했었던 적이 있다. 개전 후 사흘만에 북한군에게 서울을 함락당하고 이후 한강 방어선도 뚫린 상태에서 미군이 증원군으로 올 때까지 어떻게든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야만 했던 국군은 수원화성을 방어 요새로 활용해서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하여 수원화성에서 북한군의 T-34 한 대를 파괴하고 북한군을 하루 정도 수원화성에 붙잡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이튿날 T-34의 포격에 장안문과 성벽 일부가 파괴되고 국군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성 밖으로 탈출하여 후퇴했다. 결국 고폭탄 같은 현대적인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쌓은 수원화성은 전투가 벌어지자 고작 하루만 버티고 북한군에게 함락당한다. 어차피 국군도 200여 년 전에 지은 성이 현대전에서 효용이 있을 거라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당시 국군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미군이 올 때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거지 행주산성 전투나 안시성 전투처럼 수원화성을 사수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에 수원화성은 그러한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남한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성전이다.

전쟁 후 복원

 장안문은1951년 1월경까지는 반파된 채 존재했지만, 1년 뒤인 1952년에는 반파된 문루는 무너지고 홍예의 형태까지 더 심하게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참고 한국전쟁 당시 수원화성의 4대 문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게 장안문이다. 다행히 《화성성역의궤》가 온전히 남아있어, 성이 완전히 무너져도 복원할 수 있다. 현재 화성은 복원물이나, 철저히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기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복원물, 혹은 최근에 건축된 건물은 극히 적은데 수원화성이 지정된 이유는, 원래 설계 도면과 건축 방법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과거 건축 방법 그대로 재연해서 복원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즉 이론상으로는 완전 복원이 가능한 성이다. 일제강점기에 거의 반 해체된 상태였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거의 복원됐다. 팔달문은 1975년 복원을 했는데 처음에는 공사가 잘못 진행되었다고 한다. 당시 책임을 맡은 대목장 신응수의 말로는, 기둥의 굵기가 미묘하게 가늘어 문화재청 측에 계속해서 굵기를 굵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결국 복원 중에 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고 기둥의 치수를 확인하니 대목장의 말이 옳았다고. 결국 후손들에게 '나는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니 너희가 지혜롭게 해결해 달라'라고 기둥에 먹칼로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문화재청 정밀 진단조사 결과, 들보 등에 심한 균열과 뒤틀림이 생겨, 2011년부터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해서 원래대로 복원 공사를 해, 2013년 초에 다시 완공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성곽 근처에 많은 이들이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꾸준히 문화재 구역 안의 사유 주택들을 매입해서 허물고 문화재 구역으로 바꾸는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화성 인근지역은 건축 규제가 심한 편으로 많은 주민들의 불만사항이기도 하다. 현재는 남공심돈으로 대표되는 팔달문 주변 일부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복원되지 못했다. 정확히는 팔달문 기준 서남암문쪽으로 95m, 남수문쪽으로 160m 정도가 건물이 들어선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따라서 팔달문 좌우에 있어야 하는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도 복원되지 못했다. 참고로 적대는 장안문 좌우와 팔달문 좌우에만 있다. 현재는 팔달문시장의 일부가 철거되는 등 복원의 기초가 다져지고 있다.

복원 그 이후

 복원 이후 현대에도 은근히 수난을 겪고 있다. 2006년 5월 화성 서장대에서 20대 청년이 술을 마시고 서장대 안에서 자다가 술김에 추워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불을 질러 태워먹었다. 이 바람에 정조어필인 서장대 현판까지 전부 다 불타버렸는데, 지금 있는 서장대는 새로 지은 것이다. 이미 불타버린 서장대도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었고 90년대에 불태워먹은 서장대도 6.25전쟁에 휘말려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한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에도 누군가가 불을 지르려 한 적도 있었다. 문에 불을 질렀는데, 다행히 서장대 사고 이후 방화 창호지를 썼기 때문에 큰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2013년에는 성벽에다 불을 지른 적도 있는데 용의자는 중학생이라고 한다. 용의자의 진술에 따르면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해 성벽 자체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 성벽 주변 억새밭에다 불을 질렀다고 한다. 2011년 이후 팔달문 좌우 및 남수문 일대를 제외한 성곽 전 노선이 연결되었다. 이로써 팔달문을 기-종점으로 삼아 화성 일주가 가능해졌다. 화성 일주는 성인 기준으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팔달문과 같은 이유로 성벽 좌우측이 절단된 장안문 및 성벽 일부가 헐린 창룡문의 경우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팔달문 인근이 이렇게 연결이 어려운 것은 이미 못골시장, 영동시장 등을 비롯한 재래시장 및 상가들이 밀집한 상태라 이걸 다 헐어내고 성곽을 연결시킨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12년 6월 9일, 1922년 대홍수 때 파괴된 남수문의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수원천 복개구간 철거 공사와 맞물려 이루어진 공사인데, 상부의 여장은 화성성역의궤에 근거하여 복원되었으나, 하부의 수문은 9개의 수문은 유지하되 홍수 대비를 위해 세부는 상당히 다르게 복원되었다. 원래의 수문은 오각형 기둥이 이중으로 배열되고, 전/후열의 기둥 사이가 비어있었으나, 복원된 남수문은 일자형 기둥으로 건설되었다. 이는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향후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 여하튼 현재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을 제외한 전 성벽이 연결된 상태다. 한편 흙을 조달하고자 팠던 연못들(상남지, 하남지, 상동지, 하동지, 북지)은 아직도 복원되지 않았다. 현재 남지와 북지는 복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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