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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한국 관광지 100선 7,8 - 수도권 지역 < 창덕궁과 후원> <인천차이나타운>

by 또바기벗 2023.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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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차이나타운 >

 이번 글에서는 순서상 창덕궁과 후원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했으나 창덕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글이 있기 때문에 7번은 건너뛰어 8번인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해 소개하겠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인천역 앞에 있는 차이나타운이다. 중국 음식점이나 기념품 등을 파는 상점이 많은 편이다. 화교중산학교가 있다. 매년 9월과 10월엔 각각 인천-중국의 날 문화축제와 짜장면 축제가 열린다.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1884년에 만들어진 중국(청나라) 조계지에 화교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특이하게 산둥 출신이 중심을 이룬다.

인천 차이나타운 상세

 과거에는 노후화된 분위기에 중화권적인 조형물이 듬성듬성 설치되어 있는 주거지와 상업 지역이 밀집해 있던 곳이지만 대대적인 정비사업 이후로 매우 깔끔해졌고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지역이자 인천의 상징물이 되었다. 무엇보다 여기가 인천항 개항 당시 도심이었고,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곳, 일본인과 화교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근대식 공원, 최초로 건설된 세관 등이 이 지역 부근에 있었다. 당시 공화춘이 있던 지역으로 짜장면이 발생한 지역으로 명성이 있다. 최근에는 재한화교 거주지,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 중화요리점, 만두집, 도교 사원, 불교 사찰, 공묘, 중화감리교회, 짜장면 박물관, 화교 역사관, 한중 문화관 등 중화권과 관련된 곳 외에도 개화기 시절 건설된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 대한성공회 내동성당, 구 선교사 자택 등 서양식 건물, 적산가옥 등 일본식 건물이 남아있다. 북성동에 위치해 있다. 인천 중구 도심 지역은 외국인이 많은 동네이고 재한화교의 비율이 높다. 이는 재한화교와 같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차이나타운 개발을 했다. 처음에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지만 도심 재개발 이후 인근 동화마을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관광객 수가 늘어 성공하게 되었다. 특히 차이나타운의 경우 관광상품화가 되면서 짜장면의 개발지, 전례지로 하려는 인천시 자체의 노력, 재한화교의 노력 및 일부 귀국 등으로 인해 중화 요리가 유명하다. 주변에 맛있는 만두 가게, 월병 가게 등이 있다. 한국에서 과거 재한화교가 많이 살았던 차이나타운이다.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은 재한화교 거주지,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 중화요리점, 만두집, 도교 사원, 불교 사찰, 공묘, 중국인 교회인 중화감리교회, 짜장면 박물관, 화교 역사관, 한중문화관 등 중화권과 관련된 곳이 많아 이국적인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 짬뽕 대신 다른 중화요리를 판매하는 가게도 있고, 월병, 만두 등을 팔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지역 주민들은 차이나타운 외 인근 중국집을 찾기도 하는데 인근 지역 쪽도 재한화교가 운영하는 곳들이 많다. 실제로 차이나타운에 와서 다른 중화 요리를 찾기도 한다.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 역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시달리고는 했다. 다른 원도심 내 재래시장들과 비슷하게, 사스나 메르스 때도 이 정도 불황은 아니었는데 상황이 심각하다며 해당 구역 상인들은 그야말로 사업이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상당수는 휴업 중이고 일부 가게는 폐업도 고려했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온상처럼 혹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관되었다는 오해를 받아 제노포비아와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냉전 시기에 쓰이는 중공이라는 단어가 다시 쓰일 정도였다. 특히 화교 역사, 양안관계를 모르는 한국인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천 차이나타운 거주민들은 한국 여권과 중화민국 여권을 보유하는 이중국적자나 한국 여권과 중화민국 여권 중 하나만 갖는 단일국적자의 비중이 높으며, 중화민국과 관계가 깊고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당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거리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가 아닌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다수 눈에 띌 정도인데다 간체자 간판이 하나도 없고 정체자 간판만 있다. 이러한 광경이 목격되고 하면서 이제는 오해가 풀려서 중화민국 출신의 한국 화교를 중국 공산당과 엮는 사람은 없다. 2022년 4월 이후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도 소생하고 있다. 특히 수도권 전철 수인선의 개통으로 그간 인천에 오기 힘들던 용인, 성남, 수원, 화성, 오산 등 경기 남부 지역 사람들까지 찾게 되어 더욱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역사

 조선 말 청나라 사람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임오군란 때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의 정세가 급변하자 청은 조선의 공식 요청이 없었는데도 산둥성에 주둔 중이던 오장경(吳長慶)의 수군을 파병하였다. 오장경이 지휘하는 4,5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40여 명의 상인이 따라 들어왔으며, 이들은 청군이 주둔하던 용산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사신 왕래나 공무역인 개시(開市)를 통해 중국인이 조선에 머무는 일이 잦았으나, 장기 체류를 한 것은 이 일이 시초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제물포는 개항 후보지로 선정되었지만 실제 개항지로 선정되는 데에는 6년이 걸렸다. 조선도 서울의 바로 옆에 개항장이 들어서는 것을 꺼렸고, 일본도 다른 후보지들을 물색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1882년 제물포가 개항지로 선정되었고, 청과 일본,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제물포로 몰려들었다. 1883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제물포에 조계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 직후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관을 세웠고, 청나라 역시 청국이사부(靑國理事府)를 세웠다. 1885년 청나라는 본국과 연결되는 전신선을 세웠다. 청나라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채결하고 제물포를 통한 무역을 시작하였다. 1884년 3월 7일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어 청조차지가 결정되었고, 이후 이곳에 많은 중국인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당시의 조차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의 화교 규모는 1910년 11,800 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2,800여 명이 조계 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인천에 사는 화교는 약 2,000여 명으로 차이나타운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는 약 120 가구 500명이다. 1883년 개항이 된 이래, 인천 차이나타운 내에는 중국의 종교시설이 만들어졌다. 황합경(黃合卿)이라는 스님이 창건하여 1884년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의선당이라는 묘우(廟宇: 신위를 모셔놓은 곳, 일명 사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화교들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던 이곳은 1970년 거의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가 2005년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 후 다시 문을 열었고, 현재 이곳은 인천광역시 화교협회 지정 문화유산 제1호이다. 조계지가 형성된 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청나라 정부의 호호 아래 상하이와 인천을 오가는 해운 사업이 지속되었다.1883년 취항한 남승호는 월 1~2회 나가사키와 부산을 경유하여 상하이와 인천을 오갔다. 1888년부터는 상하이에서 산둥성을 거쳐 인천으로 연 20회 운항하였다. 이를 통한 무역도 활발하여 청일전쟁 당시인 1984년 조선의 무역 가운데 중국 무역은 절반에 해당하는 13,446,363원이었다. 청조계지의 화상(華商)은 처음에는 광동, 홍콩 지역 출신의 남방상인이 많았으나 점차 산둥 출신의 북방상인이 늘었다. 또한 화교 노동자 역시 개항장 인천의 건축 붐에 따라 입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산둥성 출신이었다. 이들을 따라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요리업자가 들어왔고, 요리업자에게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농부들이 들어왔다. 1905년 무렵 산둥성의 가정 요리에 바탕을 둔 짜장면이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하였다. 차이나타운 내에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가 있다. 1901년 중산소학교로 개교한 이 학교는 한 때 학생수가 1,500명에 이르는 큰 학교였고, 평택이나 수원 등지에서도 화교들이 자녀를 입학시켰다. 지금의 학생 규모는 400여명이다. 1992년 8월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과 국교를 단절하였지만 학교는 여전히 중화민국의 소유로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매년 졸업생 중 10여 명이 대만으로 유학 간다. 유학생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1950년대 중반 졸업생 이수영을 들 수 있다. 당시 인천 당면 공장 화교 노동자의 딸이었던 이수영은 13세에 대만으로 유학하여 1961년 18세의 나이로 미스차이나에 선발되었다. 이수영의 일은 대한민국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1971년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이 한 가구에 200평 이하의 주택 한 채와 50평 이하의 점포 한 채만을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음식점과 자영업은 큰 타격을 맞았다. 서울의 태화관 인천의 공화춘과 같은 대형 음식점은 문을 닫았다. 이후 중국음식점은 영세한 규모를 면하기 어려웠다. 1973년 정부는 분식 장려를 명목으로 중국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식당은 밀가루를 밥알처럼 때어 말린 다음 쪄서 볶음밥을 만들어야 했다. 화교 단체들의 진정으로 3개월 만에 쌀밥 판매가 재개되었지만 화교들은 큰 심리적 위축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갖가지 규제를 견디지 못한 화교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과 대만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화교 인구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차이나타운은 쓸쓸히 퇴락해가는 곳이었다. 인천항의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상권을 잃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부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또한, 2001년 문화관광부가 차이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근대문화재를 재정비하면서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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