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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궁9

경희궁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1 이번 글에서는 경희궁 내 건축물 중 홍화문과 숭정문 그리고 숭정전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흥화문(興化門)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년)에 세운 경덕궁(현재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와 향이 다르게 남향으로 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숭정문(崇政門)은 경희궁 정전의 정문인 만큼 공적인 사용 빈도가 높은 문이었다. 형태 또한 궁궐 안에 있는 어떤 문보다 아름답고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 부속된 정문이.. 2023. 8. 16.
덕수궁 내 내조 영역의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2-2] 저번글에 이어 이번에도 덕수궁 내 내조 영역에 있는 건축물 중 석어당과 덕홍전에 대해 알아보겠다. 석어당(昔御堂)이라는 명칭은 ‘옛 왕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을 떠났던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정릉동에 있는 행궁에서 머물던 전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덕수궁 석어당의 1층에는 고종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1904년(광무 8)에 중건할 때 김성근(金聲根)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혼전인 경효전(景孝殿)으로 건립되었으나,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개조된 이후 덕홍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덕홍전으로 교체된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외빈과 신료들을 접견하였다. 덕홍전은 .. 2023. 6. 21.
서울의 궁궐 덕수궁의 역사[1]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된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법궁으로 사용되다가 순종 즉위 후 궁의 이름을 현재의 덕수궁으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영역 외에 선원전, 홍원, 중명전 영역도 덕수궁의 영역으로 모두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 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 2023. 6. 16.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문정전과 숭문당이 있다. 문정전은 1483년(성종 14) 옛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을 조성할 때,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건물 조성이 완료된 1484년(성종 15)에 서저정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과 함께 문정전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창경궁은 대비들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궁궐의 규모가 비교적 작으며 격식을 갖추지 못한 부분이 있다. 특히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을 잇는 축이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동향을 하고 있는 반면, 정전과 맞닿은 편전인 문정전은 남향으로 축을 달리하고 있다. 원래 편전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나 실제 편전으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조선후기 계속해서 혼전이 설치되어 .. 2023. 6. 11.
창경궁 외조의 정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창경궁 외조는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정전 권역과 편전 권역으로 나누어진다. 정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명정문과 명정전이 있다. 편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문정전과 숭문당이 있다. 이 글에서는 명정문과 명정전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설명하겠다. 창경궁 외조의 정전 권역 내 명정문의 역사와 구조 명정문 : 조선초기에는 왕위를 이어받은 왕과 대비가 함께 기거한 일이 없었다. 선왕이 승하하기 전에 대개는 자신의 아들인 다음 왕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어, 대비(大妃)의 위계에 오른 왕비와 함께 궁궐 밖에 따로 별궁을 정해 나가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했더라도 다시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성종 이전까지는 왕이 임어한 시어처(侍御處)에 대비가 함께 머문 경우는 .. 20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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