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글에 이어 이번에도 덕수궁 내 내조 영역에 있는 건축물 중 석어당과 덕홍전에 대해 알아보겠다. 석어당(昔御堂)이라는 명칭은 ‘옛 왕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을 떠났던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정릉동에 있는 행궁에서 머물던 전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덕수궁 석어당의 1층에는 고종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1904년(광무 8)에 중건할 때 김성근(金聲根)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혼전인 경효전(景孝殿)으로 건립되었으나,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개조된 이후 덕홍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덕홍전으로 교체된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외빈과 신료들을 접견하였다. 덕홍전은 함녕전의 서쪽에 있으며 덕수궁의 건물들 중 (현대에 세운 시설물을 제외하고) 가장 나중에 지었다. '덕홍(德弘)' 뜻은 '덕(德)이 넓고(弘) 크다'이다.
덕수궁 내조 영역 내 건축물 석어당의 역사와 구조
석어당의 역사 :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전부 불탔다. 1년 뒤인 1593년(선조 26년) 한양 수복 후 환도한 선조는 지낼 곳이 없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행궁으로 삼아 임시로 머물렀다. 처음엔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부르다가 광해군 때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다. 이후 광해군은 계모 소성대비(인목왕후)와 이복여동생 정명공주를 이 궁에 유폐시켰고, 이름도 서궁(西宮)으로 바꾸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인조가 소성대비를 만나러 이곳에 왔으며, 소성대비에게 인정받은 뒤 서궁에 있는 선조가 머물던 전각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궁의 이름도 경운궁으로 환원했다. 그러나 인조는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운궁 건물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경운궁을 사실상 해체했다. 하지만 정릉동 행궁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선조가 사용했던 건물 2채를 남겼다. 비록 흔적만 남았으나, 임진왜란 때 선조가 고생한 것을 상기하려 조선 후기 임금들이 경운궁을 이따금씩 찾았다. 그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왕은 영조였다. 1769년(영조 45년) 영조는 인조가 즉위한 건물에 즉조당이란 이름을 붙였고 1773년(영조 49년)에는 선조의 환어 3 주갑을 맞아 즉조당에 ‘예전(昔)에 임금(御)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昔御堂)' 현판을 써서 걸었다. 기록 상으로 석어당 명칭은 이때 처음 보이며 원래 즉조당을 달리 일컬었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고종은 장차 돌아갈 곳으로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기 때문에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시기부터 경운궁을 궁궐답게 만드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즉조당을 달리 부르던 명칭 '석어당'을, 현재 자리(즉조당 동남쪽)에 있는 2층 건물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그 직후인 듯 하다. 그 근거로 1904년(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 당시 고종이 ‘환궁할 당시 경운궁에는 즉조당 하나뿐이었다’고 발언했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석어당이 별도로 존재했으면 같이 언급을 했을 텐데 안 한 걸로 보아, 환궁 당시까지 석어당 명칭은 즉조당의 별호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저 2층 전각이 경운궁 대공사 때 처음 지은 것인지, 아니면 선조 때부터 남아있던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앞에 썼듯, 인조 때 남긴 건물이 즉조당 외에도 1채 더 있었다는 점, 건물 양식이 민가에 가까운 점, 그리고 옛날에 왕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 이름을 굳이 새 건물에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볼 때, 정릉행궁 시절부터 존재했던 건물인 듯 하다. 1904년(광무 8년) 4월 27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서는 '인목대비가 머물던 전각'이라 했다. 환궁 후 고종은 정식 침전 함녕전 공사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석어당에서 머물렀다. 1899년(광무 3년) 1월에는 고종의 친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1주기를 맞아 망곡례[8]를 석어당의 행각에서 행했다. 1904년(광무 8년) 앞서 언급한 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예전 모습 그대로 재건했다. 1933년 일제의 궁궐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덕수궁의 건물이 헐렸을 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석어당의 구조 : 지금까지 남아있는 궁궐 전각 중 누각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건물이다.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을 2세트 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1층의 경우 초익공 양식의 공포를 두었으나 2층에는 공포가 없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다. 용두, 잡상, 취두를 일체 올리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뒷면 외관은 앞면과 꽤 차이가 있다. 기단부터 다른데 지형의 특성 상 뒷면 기단은 장대석 1벌대이다. 그리고 뒤에서 볼 때 기준으로 2, 3, 5, 7, 8칸에 각각 가퇴를 설치했고 가퇴의 측면에는 4벌의 계단을 두어 출입가능하게 했다. 또한 양 가퇴 사이에 쪽마루를 설치했고 마루의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 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으로 동쪽에 2개, 서쪽에 9개이다. 난간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만한 빈 공간이 있는데 이 앞에 댓돌이나 계단이 없다. 원래 그런 건 아니었고 나중에 사라진 것. 바깥 면의 창호를 살펴보면, 정면 기준 2, 3, 6, 7칸과 뒷면의 가퇴 부분 창호는 정(井)자 살이다. 이를 제외하고는 2층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로 되어있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뒷 툇간으로 나가는 문짝은 아(亞)자 살로 화려하게 만들었고, 동온돌에서 측면의 툇간과 연결되는 창의 경우 정(井)자 살이다.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의 총 24칸이고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총 6칸이다. 1층 내부는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 툇마루를 깔았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동쪽 온돌방은 이론 상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이나 모든 공간을 1칸으로 터서 방을 넓게 만들었다. 서쪽 온돌방은 약간 다르다. 기본 구조는 동온돌과 같으나, 대청 쪽 칸은 다른 칸과 기둥 및 문지방으로 나누었고, 나머지 칸은 서로 구분 없이 텄다. 서온돌의 서편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 계단이 있다. 방에서 측면의 툇간과 연결되는 창문의 모습도 차이가 있는데, 동 온돌쪽 창은 전통 양식이나 서 온돌쪽 창은 서양식 문짝이다. 이는 근대화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층 내부는 칸마다 구분 없이 전부 텄고 바닥은 마루로 마감한 모습이다. 천장은 서까래가 바로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으며 4번째 칸 위의 종도리에는 용 그림과 무늬를 화려하게 그려넣었다. 단, 색을 입히진 않았다.
덕수궁 내조 영역 내 건축물 덕홍전의 역사와 구조
덕홍전의 역사 :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용도로 건립되었다. 경효전은 명성황후의 전호(殿號)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돌아가시자 최초로 정해진 시호는 순경(純敬), 전호는 덕성(德成), 능호는 숙릉(肅陵)이었다. 당시 빈전(殯殿)은 경복궁태원전(泰元殿)으로 정했고, 혼전(魂殿)은 경복궁문경전(文慶殿)으로 정했다. 그러나 고종은 왕비의 장례를 바로 진행하지 않았다. 1896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으며,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새롭게 경운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왕비를 위한 빈전으로 경복궁의 경소전(景昭殿)을 경운궁에 이건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96년 9월 4일에 왕비의 시신을 경복궁 태원전에서 경운궁 경소전으로 옮겨 모셨다. 또한 1897년(고종 34) 1월 6일에는 왕비의 시호, 능호, 전호를 모두 새롭게 교체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는 경효(景孝)로 개칭하였고, 3월 2일에 시호를 다시 명성(明成)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1897년(광무 1)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에도 왕비의 장례를 바로 치르지 않고 대신 조선이 황제국에 오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가 되었으며(『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빈전에 나아가 왕후를 황후로 추존하였고, 명성황후의 국장은 1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은 이미 경소전으로 정해져 있었고, 우주(虞主)를 봉안한 이후 경효전의 역할을 담당했다. 1904년(광무 8) 경운궁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경효전으로 사용하던 경소전 역시 소실되었다. 화재 직후 명성황후의 우주는 준명전(濬明殿) 서행각에 임시 봉안하였고, 후에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모셔졌다. 이후 수풍당이 경효전이 되었다. 경운궁 화재 이후 중건 과정에서 경소전이 위치하고 있던 곳에는 원래 모습대로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기록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는 건물명을 경효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건된 경효전은 동쪽에 4칸의 이안청(移安廳), 서쪽에 4칸의 중배설청(中排設廳)을 두었고, 정면에 내삼문인 융안문(隆安門)과 좌우 각 4칸의 행각을 두었다. 행각 밖에는 12칸의 어재실(御齋室)과 4칸의 숙목문(肅穆門)을 두었다. 또 숙목문 밖에는 25칸의 ㅁ자형 건물인 장방처소(長房處所)와 3칸의 돈례문(敦禮門)을 두었다. 경운궁 중건을 통해 다시 경효전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명성황후의 우주는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해지면서 고종 역시 함녕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중명전(重明殿)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고종이 함녕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명성황후의 우주는 계속 수풍당(綏豐堂)에 머물렀고, 고종이 서거한 이후인 1921년 3월 31일에서야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효덕전(孝德殿))에 모셔졌던 고종의 우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되었다. 그 와중에 경효전을 덕홍전으로, 즉 제례와 관련된 건물을 알현실로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1912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덕홍전의 준공’이라는 제목 아래 “창덕궁 이왕 전하의 알현실 되는 인정전(仁政殿)에 의거하여 덕수궁에 건축 중인 덕홍전은 이미 낙성하여 6일 밤부터 점등하였는데 상세히 들은즉 공사비 6만여 원을 들여서 실내 장식과 다른 것들도 극히 화려한데 대벽화는 화백 천초신래자(天草神來子)의 것으로 필치가 용건하여 근래의 걸작이라더라.” 하는 글이 실려 있기도 하다.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건물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다만 내부 마감은 크게 변했다. 바닥은 혼전[경효전]에 적합하게 전(甎)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마루로 바꾸었다. 창호에는 커튼을 덧대어 설치했고 내부에 조명기구로 샹들리에를 설치하였다. 기존의 월대를 축소했고 진입 계단에 변화를 주었으며 동쪽의 함녕전, 서쪽의 귀빈실과 통행할 수 있도록 복도각을 설치했다. 현재도 복도각과 연결되었던 부분에는 서양식 판문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덕홍전으로 변경되면서 경효전 건물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경효전 주위의 부속 건물들은 크게 변했다. 경효전이 있을 당시에는 주변 건물들이 모두 제례와 관련된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 새롭게 바뀐 것이다. 이때에는 기존 관제인 궁내부(宮內府)가 해체되고 이왕직(李王職)이 들어선 시기였다. 덕홍전 공사가 진행되면서 덕수궁 소속 이왕직 청사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찬시실, 귀빈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덕홍전 전면의 삼문은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다. 귀빈실과 덕홍전 전면의 행각은 현재도 경운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진 건물들에 대해 『매일신보』 1914년 1월 1일 자 기사에서는 “일선제도(日鮮制度)를 절충한 것”이라고 했다. 즉 조선과 일본의 건축 기법을 모두 합한 건축물이라는 내용이다. 건축물 외형은 조선의 전통 양식을 따른 듯하지만 내부 구조체는 일본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보면 건축 외형이 조선의 전통적인 양식을 따랐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입면 비례가 전통적인 조선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매우 수준이 떨어지는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덕홍전의 역사 : 장대석을 네 벌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기단 앞에 장대석 세 벌을 쌓은 대를 추가로 설치했다. 기단 상판은 전돌로 마감했고, 대 위는 박석을 깔았다. 그 앞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을 두었고 측면에는 대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다. 그리고 건물의 서북쪽에 소맷돌 없는 3단의 계단을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고 기둥은 사각형, 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총 12칸이다. 출입문은 정면 가운데 칸과 동쪽 측면의 남쪽에서 3번째 칸, 그리고 서쪽의 남쪽에서 2번째 칸에 달려있다. 나머지는 전부 중방 위에 교창을 둔 창문이며 교창의 창호는 빗살로, 창의 창호는 띠살로 꾸몄다. 문은, (문이 있는)각 칸마다 중인방 가운데에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서양식 당판문을 달았다. 정면과 측면의 모습이 약간 다른데, 정면 문짝에는 판 사이에 정자 모양의 구멍을 뚫어놓았으나 측면의 문짝은 판이다. 나머지 남은 면의 경우, 정면에는 띠살 문짝과 머름을 설치했으나 측면은 벽으로 메꾸었다. 실내는 전부 1칸으로 뚫려 있으며 바닥은 전돌이다. 사실 원래는 카페트를 깔았는데 나중에 치운 것. 천장은 우물반자로 하고 반자청판에 구름 속을 날고 있는 두 마리의 봉황을 그려 넣었다. 근대 이후에 지어서 그런지, 내부 장식에 서양식을 가미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달았고, 교창에는 커튼박스를 설치했다. 커튼박스는 양 가장자리에 날개를 문 듯한 모양의 봉황머리가 있고, 가운데에 금색 오얏꽃 조각이 달린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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