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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서울의 궁궐 덕수궁의 역사[1]

by 또바기벗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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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야경>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된 조선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법궁으로 사용되다가 순종 즉위 후 궁의 이름을 현재의 덕수궁으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영역 외에 선원전, 홍원, 중명전 영역도 덕수궁의 영역으로 모두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 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중건했으며, 1906년엔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게 됐다. 1907년(순종 1)엔 순종이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역이 대규모로 축소되고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덕수(德壽)는 '덕이 높고 오래 산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의 역사는 크게 7가지 시기로 나뉘게 된다. 조선 초기(월산대군 저택), 행군시기, 경운궁 시기, 법궁 시기, 화재 및 덕수궁 시기, 일제 강점기 시기, 광복 그 후 시기 이렇게 나뉜다. 이 글에서는 조선 초기 ~ 법궁 시기 4가지 시기에 대해 알아보겠다.

 

- 조선 초기 : 현재의 덕수궁 자리에는 본래 1469년(예종 1년) 남이의 옥에 연루된 조영달(趙穎達)의 집이 있었다. 왕실은 조영달이 역모에 연루된 까닭에 그 집을 몰수하였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470년 성종이 즉위한 뒤 세종의 막내아들이자 적8남인 영응대군 이염(李琰)의 처(妻) 송씨에게 하사하였다. 이듬해 송씨가 이 집을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延慶宮)으로 지었다. 이듬해인 1472년(성종 3년) 12월에는 성종의 생부인 의경세자 이장(李暲)의 묘(廟)인 의묘(懿廟)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고, 의경세자의 장남으로 제사를 지낼 월산대군에게 연경궁을 하사하였다. 의경세자가 20세에 죽고 그의 부인이자 성종의 생모인 수빈 한씨(인수대비)가 왕대비가 되어 입궁한 까닭에 월산대군이 오롯이 연경궁을 소유하게 되었다. 1475년(성종 6년)에 의묘의 위패를 경복궁 안의 연은전(延恩殿)으로 옮기게 되어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집으로만 남았다.

- 행궁 시기 : 월산대군이 사망한지 104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했다가 이듬해 10월 4일에 환궁한다.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된 까닭에 선조는 과거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연경궁을 고치고 주변의 여러 가옥과 대지를 궁역으로 합친 뒤 임시 거처지인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정릉동에 있다 하여 정릉동(貞陵洞) 행궁 또는 정릉행궁이라 불렸다. 정릉행동과 소공동 부근은 왜장들이 한양을 점령했을 때 주둔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임금이 오랫동안 거처하기에 부적합한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궁궐로의 환궁을 염두에 둔 임시거처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즈음 선조가 자식들에게 내탕(內帑)을 임시로 변통하여 나눠준 뒤 이 선례에 따라 궁방전(宮房田)을 나눠주었기 때문에, 왕실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하는 명례궁(明禮宮)이 설치된 것으로 본다. 명례궁은 석어당의 북쪽, 정간헌의 서쪽에 존재했다. 정릉행궁의 규모가 협소한 까닭에 선조는 창덕궁의 중건을 지시함과 동시에 주변의 민가를 매입하여 궁역에 포함시키도록 지시한다. 이때 집주인들에게 집값을 지불했고, 사인(士人)의 경우에는 관직을 제수했다. 선조는 이후 창덕궁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608년 석어당에서 죽었다.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도 정릉행궁 즉조당에서 즉위했다.

- 경운궁 시기 : 1611년 11월 15일(광해군 3년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으며 비로소 왕궁이 되었다. 원래는 흥경궁(興慶宮)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라고 하였으므로, 경운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광해군은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해 음력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 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음력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이 인조로 등극한다.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만나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8일 후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그해 음력 7월에는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즉조당과 석어당의 두 건물을 제외하고 30년간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경운궁은 두 채의 건물만 남긴 채,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 후 영조는 1773년(영조 49년), 선조의 환도어거 1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의 2월 21일(음력 2월 1일) 세손(후의 정조)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1883년 루시어스 푸트가 미국 공사로 파견됨에 따라 5월에 민계호의 집을 구입해 미국 공사관으로 삼았다. 영국은 1884년 조영 통상 조약을 맺고 공사를 파견하였으며, 미국의 선례를 따라 마찬가지로 정동에 영국공사관을 건설하였다. 러시아도 같은 해 조로 수호 통상 조약을 맺어 공사를 파견하였는데, 역시 정동에 러시아공사관을 지었다. 외국인 공사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 역시 정동에 집을 마련했고, 배재학당 등 교육시설과 새문안교회 등 교회도 정동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경운궁 주변 정동은 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스며들어 유럽인 정착지 또는 유럽인 정착지(European Quarter), 공사 거리(Legation Street)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 법궁 시기 :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살해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이에 친미파 및 친러파 관료들은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카를 베베르 등과 함께 춘생문 사건을 일으킨다. 그러나 어윤중이 주모자를 채포하고 처형함에 따라 춘생문 사건은 좌절된다.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세자와 함께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벌인다. 실제로 1981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것은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왕태후인 효정왕후와 왕태자비인 순명효황후는 경운궁으로 이어 시킨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2월 16일에 경운궁의 수리를 명령하고, 5월에는 경운궁 대유재(大猷齋) 등에서 고무라 주타로를 만나는 등 경운궁에서 종종 외교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9월 4일에는 명성황후의 혼백과 시신은 경소전(景昭殿)으로, 포함해 경복궁 선원전에 있던 국왕의 어진들을 옮기며 진전(眞殿)을 경운궁의 별전으로 이봉(移奉)하였다.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멈추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한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구미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어의 뜻을 보인 것과는 달리, 경운궁은 광해군이 거주한 이후 제대로 된 궁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직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아있었다. 이에 1896년 고종의 지시로 개수되기 시작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는데, 1896년 11월 19일에 민병석을 인화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하는 등 1896년 경운궁을 개수할 때 인화문을 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화문은 궁의 남쪽에 위치하여 정전인 중화전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중화전의 착공은 1901년에 이루어졌으며, 완공 전까지 고종은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泰極殿)으로 바꾸어 정전 대용으로 사용했다. 원래 경운궁은 법궁으로 사용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입지가 매우 좁았다. 따라서 조정은 경운궁 주변의 토지를 매입해 경운궁으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덕수궁에 영국 공사관, 미국 공사관, 독일 공사관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영역을 넓히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주변 선교사에게 연락을 취해 주택 매입의사를 밝히고 공사관의 협조를 구한 결과, 미국 공사관 주변의 선교사 주택을 매입하고 독일 공사관의 부분적 협조를 얻어내었다. 정동 여학당이 연지동으로 이전하며 선교사들도 연지동으로 많이 이사를 간 터라, 선교사 사택이 경운궁 확장영역에 포함될 수 있었다. 1899년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사택을 제외한 영역을 구입해 수옥헌을 지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토지 이외에도 조선인 민가를 매입하고 관공서를 합병시키는 방식으로도 영역을 넓힌다. 대표적으로 경운궁 북측의 세관기지와 수어청을 경운궁에 합병했다. 이런 까닭에 경운궁은 복잡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공사는 계속되어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선원전에 불이 났으며, 봄에는 발전소의 설비가 끝나 궁내에 전기의 공급이 시작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함녕전·선원전·경효전(景孝殿)·흥덕전(興德殿)·사성당·준명당(浚明堂)·경운당(景雲堂)·덕경당(德慶堂)·함유재(咸有齋)·청목재(淸穆齋)·보문각(普文閣)·문화각(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인화문(仁化門 : 正門)·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또한 홍원 영역을 한성부로부터 구매하였는데, 비용 지출은 1904년 10월에 했다. 1901년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가설·개통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법전(法殿)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이 법전을 중화전이라 이름 지었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도 완공되었으며 관명전도 영건 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 1902년에는 중화전을 정전으로 하는 삼문삼조체계를 갖추고자 하였다. 중화전의 앞에 내문으로 중화문을 건설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중화문 앞에 외문을 짓고 외조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따라서 독일 공사관에 토지 구매 의사를 밝혔으나 토지를 일부 얻는 것에 그쳐, 정전과 내문에 일직선으로 외문을 설치하지 못하고 외문인 조원문(朝元門)을 동측으로 꺾게 되었다. 외문인 조원문의 방향이 틀어짐에 따라 경운궁의 경복궁처럼 전형적인 남북방향 축이 아닌 창덕궁처럼 동서의 축을 갖게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화재 및 덕수궁 시기, 일제강점기 시기, 광복 이후 시기에 대해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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