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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덕수궁의 서양식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3-1]

by 또바기벗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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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덕수궁의 마지막 구분 지역인 서양식 건물의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덕수궁내 서양식 건축물에는 석조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중명전, 돈덕전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석조전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대해 알아보겠다. 석조전(石造殿)은 덕수궁의 전각으로, 구한말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이다. 중화전의 서북쪽, 준명당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1897년에 건립하여 경술국치해인 1910년에 완공되어, 대한제국과 역사를 함께 했다. 근대에 지은 덕수궁에는 서양식 건물인 양관(洋館)이 여러 채 도입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고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지은 서양식 궁전이 석조전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 궁궐에서는 정전, 편전, 침전의 기능이 각각 구분되어 있던 것에 비해, 석조전은 서양의 주거 양식을 도입하여 그러한 기능을 하나의 궁전 내부로 통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석조(石造)'는 '돌[石]로 만들었으므로 [造]' 붙은 이름으로, 전통적인 궁궐이 목조에 기초한 것에 대비되는 이름이다. 사실 석조전은 정식으로 부여된 전각의 명칭은 아니다. '경복궁 근정전'과 같이 전각의 이름을 지을 때는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석조전은 정전이나 침전의 일부가 아니며 위에 언급했듯 그 자체로 하나의 황궁이기 때문에 굳이 전각의 이름을 부여할 필요가 없었고, 또 완공(1910. 12)되기 전에 대한제국이 멸망(1910. 8)하였으므로 궁으로서의 기능이 소멸되어 이름을 부여할 시간이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덕수궁 내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1998년 개관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설립목적은 한국 근대 미술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체계화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함이다. 덕수궁미술관은 19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근대 미술뿐만 아니라 아시아 및 서구 근대미술을 함께 다루고 있다. 기획전시, 소장품전시를 비롯하여 근대 미술 관련 조사연구, 출판, 교육, 학술행사와 같은 여러 활동을 통해 미술의 물적, 인적 교류를 도모하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덕수궁 내 서양식 건물 건축물 석조전의 역사와 구조

 석조전의 역사 : 대한제국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이 건립을 발의했다. 처음에는 경희궁에 지으려 했으나 브라운 권유로 경운궁에 세웠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으로 환궁한 지 한 달 채 못 지난 1897년(건양 2년) 3월에 브라운이 통역관과 함께 경운궁 안 지형을 측량했다는 〈독립신문〉 기사를 보아 이미 그때부터 서양식 궁전 건설을 기획한 듯하다. 공사 진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었다. 1897년(건양 2년) ~ 1901년(광무 5년)에 설계 및 기초공사를, 고종의 즉위 40주년이 되는 1903년(광무 7년) ~ 1906년(광무 10년)에 구조공사, 마지막으로 1907년(광무 11년) ~ 1909년(융희 3년)에 내부공사를 했다. 1903년부터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을 먹이로 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었다. 그 긴박한 시기에 고종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기 위해 경운궁 내에 석조전을 건축하였다. 설계는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날드 하딩(J. R. Harding)이 맡았다. 하딩은 석조 건물이 낯선 한국인들에게 공사에 앞서 나무로 1/10 정도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1900년 5월 26일자 미국 잡지 《아메리칸 아키텍처 앤드 빌딩 뉴스(American Architecture and Building News)》에서 저 모형을 실었다. 기초공사는 1900년(광무 4년)부터 시작했다. 한국인 건축기사 심의석[7]이 참여한 가운데, 일본인 오가와 요키치(小川 陽吉) 기사를 초빙하여 1901년에 마무리했다. 자재는 창의문 근처 돌산에서 나는 화강암을 활용했다. 1902년(광무 6년)에서 1903년(광무 7년)에는 공사를 멈췄다. 오다 쇼고(小田 省吾)가 지은 《덕수궁사》에는 그 이유로 정변(政變)을 꼽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후 1903년에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때 건축 주도권이 브라운에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 種大郞)[9]에게 넘어갔고 공사도 일본 오쿠라도보쿠구미(大倉土木組)[B]에서 맡았다. 이시이 슈헤이(石井周平)를 감독으로 하고 두 일본인 기사를 두고 공사를 진행했으며 1905년(광무 9년)부터는 영국인 헨리 윌리엄 데이비슨(Henry William Davidson)이 합류하여 함께 작업했다. 내부 공사는 2년이 걸렸다. 설계는 영국인 로벨(Lovell)이 맡았다. 배관 및 난방 시설 설치는 영국의 크리털 회사(Critall & Co.)에서 담당했고, 내부 장식과 가구 등은 역시 같은 영국의 메이플 회사(Messers Maple & Co.)에서 맡았다. 1909년(융희 3년)에 드디어 완공했고 1910년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낙성했다. 그런데 약 3달 전인 1910년 8월 29일에 이미 나라가 망했다. 그래서 처음 계획처럼 황궁으로 쓰지 못했다.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은 석조전을 공들여 지어놓고서는 막상 완공 후에는 불편하다며 거주하지 않았다. 단지 귀빈 접대 및 만찬을 행하는 정도로 사용했다. 침실로 사용한 것은 이왕세자로 전락한 의민태자(영친왕)이었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는 간간이 조선에 올 때마다 여기서 지냈다. 1922년에는 아내 이방자와 돌도 채 안된 아기였던 장남 이진과 함께 와서 머물렀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이진이 갑자기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1933년에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화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했다. 그러면서 건물 내부와 앞 뜰도 많이 바꾸었다. 미술관이 된 뒤 일본 근대 미술품만 전시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처음에는 조선 작품도 같이 전시하려 했으나 일본 미술가들이 "조선인의 작품을 한 공간에 같이 전시할 수 없다"라며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1936년에는 서남쪽에 새로운 이왕가미술관을 지어 1938년에 완공한 뒤 개관했다. 석조전은 근대일본미술진열관이라 했고 신관은 조선고대미술진열관이라 하여 조선 미술품을 전시했다. 이것이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흔히 석조전 서관으로 부른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는 임시정부 대환영 기념 잔치가 열렸고 1946년 3월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그 유명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면서 민간에 비공개되었다.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덕수궁을 일반에 다시 개방했으나 석조전은 여전히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이후에도 UN한국위원단에서 여러 번 회의장으로 사용했으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새 외무부 청사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를 입어 1954년 5월에 보수했다. 1955년부터 1972년까지는 국립 박물관으로, 1973년부터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그리고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덕수궁 석조전 동관'이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80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덕수궁을 이미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어서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2005년 궁중유물전시관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편한 뒤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석조전은 비었다. 이에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할 지 아니면 원래 황궁으로 복원할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복원하기로 하여 2009년부터 공사를 개시했다.

 석조전의 구조 : 지층, 1층, 2층으로 나누었다. 정면 54.2m, 측면 31m, 높이 17.5m이며 연면적 약 4,122㎡(약 1,226평)의 규모이다. 석조전의 외부는 전체적으로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 로마 신전을 생각하면 좋다. 완벽한 좌, 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가운데에 지층만한 높이의 계단이 있고 양 옆에는 큰 좌대를 놓았다. 계단은 맨 밑에 반쯤 땅에 묻힌 단까지 합쳐 총 18단이다. 계단 위에는 현관이 있으며 좌, 우로 방과 베란다를 둔 모습이다. 모든 기둥머리는 양 끝이 아래로 회오리 치는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이다. 건물 정면과 좌, 우면 가운데 앞에 시원하게 뻗은 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을 받친 모습으로 현관을 구성했다. 이런 현관을 포티코(portico)라고 한다. 포티코는 기둥 숫자에 따라 더 자세하게 나뉘는데, 정면 현관처럼 기둥이 6개인 경우를 헥사스타일(Hexastyle), 측면 현관처럼 4개인 건 트리스타일(tristyle)이라 한다. 석조전 포티코에 세운 기둥은 줄지어 섰다(列)하여 열주(列柱)라고 하는데, 열주는 둥글지만 좌, 우 회랑의 기둥은 네모나게 각진 모습이라 차이가 있다. 출입문은 중앙 현관에 하나, 그리고 동, 서에 각각 1개씩 총 3개가 있다. 문 위엔 삼각형 모양 박공을 조각해 두었다. 현관 1층의 가장자리 바깥 기둥은 둥글다. 기둥의 3/4는 바깥으로 나와있지만 1/4는 벽 속에 있다. 가장자리 안쪽 기둥은 반대로 1/4가 나와있고 3/4가 벽 속에 있다. 1층 베란다 창은 위, 아래로 긴 모습이다. 창틀은 십(十)자로 만들었고 위에 삼각형 모양 박공을 단 뒤, 그 아래 양쪽에 돌 받침대를 놓았다. 창틀 상부는 아치형으로 만들고, 하부엔 두 직선 틀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작은 원형 틀을 각각 5개씩 둔 뒤 그 위에 대각선과 직선으로 무늬를 넣어 마치 부채처럼 보이게 했다. 2층 베란다 창문은 1층과 거의 같다. 그러나 창틀 위에 박공이 없고 단지 가로로 긴 석재 부재를 달았으며, 창문 윗부분이 깔끔한 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것이 다르다. 기둥머리 위로 처마도리(architrove), 프리즈(frieze), 코니스(cornice)를 얹었다. 코니스와 프리즈가 만나는 부분에 있는 네모난 부분은 마치 치아처럼 생겨서 덴틸스(dentils)라고 부른다.  코니스 위, 지붕 부분은 가운데 현관과 나머지 부분이 다르다. 중앙 현관 코니스 위에는 삼각형 모양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본래 그리스 건축 양식의 페디먼트는 아르테미스 신전 항목 복원도에서 볼 수 있듯 건물 전체의 지붕으로 설치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신고전주의 양식에 와서는 건물 폭에 다 맞추지 않고 건물 중간 부분에만 돌출시키는 부분 장식 형태로 변했는데, 석조전 역시 건물 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중앙 현관을 돌출시킨 뒤 그 위에만 설치하였다. 페디먼트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과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오얏꽃 잎을 장식했다. 현관부를 제외한 나머지 코니스 위에는 중간 부위가 호리병처럼 생긴 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좌대를 세운 뒤 그 위에 세로로 무늬를 낸 항아리 모양 장식을 올렸다. 이런 장식을 피니얼(finial)이라고 한다. 기반층과 건물 뒷면 돌 표면을 굵고 거칠게 처리하여 재질감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이런 방식을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이라 한다. 뒷면을 제외하고는 동, 서, 남쪽으로 베란다가 있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나 아시아권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덥고 습한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람이 잘 통하는 베란다를 건축 양식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2층과 1층 기둥 사이마다 가운데가 호리병 형태로 된 난간을 둘렀다. 지층 주변을 기단부 기둥으로 둘러쌓았다. 지층도 베란다처럼 뒷면을 제외한 동, 서, 남쪽에 있다. 지층의 출입문은 가운데 가장자리 2칸과 동, 서 양쪽 끄트머리에 각각 1칸 씩 위치해 있다. 지층의 창문은 별다른 장식이나 구조물이 없다. 1층 서쪽 가운데 칸 앞으로 난간을 둔 석조 복도각이 있다. 이 복도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통한다. 초창기에는 없었고, 1938년에 세운 것이다.

석조전의 내부 중 지층은 원래 궁인들 공간으로 추정된다. 평면도와 같은 자세한 자료가 없어 자세하게는 모르나, 석조전 만찬에서 먹던 서양식 요리들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서구식 주방이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미술관으로 바뀌면서 지층도 수장고로 바꾸었기 때문에 궁인들 공간이란 것을 제외하면 대체 어떤 용도로 활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2014년 복원 완료 이후, 대한제국 역사관이란 명칭으로 개방한 내부 공간 중 유일하게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한 곳이다. 전체 공간 중 동쪽에 위치한 1층으로 올라가는 서쪽 계단을 중심으로 네 방만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1번 방은 덕수궁 주변 풍경, 2번 방은 고종의 근대적 개혁, 3번 방은 대한제국 신문물, 4번 방은 덕수궁 복원기에 대한 주제 등 주제 별로 전시 공간을 구성하였다. 개방하지 않은 방들 중 중앙에 유일하게 큰 방이 있다. 복원 전에 수장고로 썼던 방이다. 내부적으로 어떠한 고증 자료가 전무한 곳인데다가 궁인들 및 석조전의 생활 등을 보조하는 공간이기에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다. 석조전의 내부 중 1층은 귀빈을 접견하는 공간이었다. 중앙의 중앙홀과 접견실을 기점으로 지층처럼 좌우 계단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여덟 방이 있으며, 전방과 후방의 방들은 세로로 뻗은 복도가 공간을 분리한다. 여기서부터 대리석과 영국식 패널로 희색 벽면에 금박을 입힌 철재 장식, 또는 단순하게 사각형 테두리면에 금박을 입힌 화이트 앤 골드나 락커 칠한 원목 판넬링으로 마감한 화려한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1층 중앙홀은 복층 구조 공간이다. 관람 시 제일 먼저 들어가는 공간이다. 2층의 회랑형 복도를 지탱하는 척하는 기둥 머리가 금박을 입힌 이오니아 양식의 16 기둥이 서 있다. 벽의 내부 장식은, 흰 벽을 금박 입힌 철재 장식물로 장식한 영국식 신고전주의 양식의 인테리어이다. 같은 신고전주의 양식 가구인, 상판이 대리석으로 된 탁자와 의자, 안락의자, 입식 전 등이 있다. 탁자는 본래 석조전에 있던 가구 중 현대까지 남아 있던 것으로 창덕궁 대조전에 있었다. 그러다 중앙홀에 있던 시절 사진을 확인하여 복원 후 원래 있던 중앙 홀로 옮겨온 것이다. 1층 귀빈 대기실은 중앙홀 우측방이다. 대한제국역사관 해설 관람시 중앙홀 다음으로 이동하는 방이다. 귀빈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던 방으로 기둥 장식이 없는 것만 빼면 중앙홀과는 기본적으로 같은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좌측문은 엄격한 대칭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영국 신고전주의적 인테리어 양식을 엄수하기 위한 가짜다. 열면 빈 벽만 있을 뿐이다. 주로 귀빈들은 황실에서 대접하는 비스킷, 과자, 샴페인 등을 먹으며 황제 폐현을 기다렸다고 한다. 대기실에는 협탁, 탁자, 원탁, 4개의 의자, 장의자, 장식장이 있다. 이 중 장의자와 장식장 또한 원래 있던 가구이다. 나머지는 전부 시공 당시 메이플사에 의뢰한 가구의 카탈로그를 참고해 재현한 복제품이다. 벽난로 위 거울은 사람 키에 맞지 않게 상당히 높이 있다. 이는 거울을 높은 곳에 둠으로써 빛을 반사시켜 건물을 환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전등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현대보다 전등 빛이 환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거울은 사치품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여러 개씩 깔아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층 접결실은 중앙홀 위쪽에 위치한 방이다. 1층 방들 중 가장 큰 방이다. 황제를 폐현하는 곳으로, 다른 방들과 달리 황실 문장인 이화문을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화는 이화여자대학교 상징인 배꽃이 아닌 자두꽃(오얏꽃)이다. 중앙홀과는 인테리어가 같으나 가짝 기둥 2쌍과 기둥 2쌍이 있는 것이 다르다. 카펫 위로 여러 의자와 안락의자, 장의자, 협탁 2개, 원탁 2개, 입식 전등을 배치하였다. 기둥 위 이화문들은 모두 실제로 도금한 것이며, 이외 금색 장식은 칠을 한 것이다. 폐현은 황제께 나아가며 총 세 번 몸을 숙여 인사를 하며 나아가고, 뒷걸음으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외국 사신들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럽고 어려운 절차였다고 한다. 특별전이 있을 때에는 가구를 모두 치운 뒤 대형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접견실에서 가장 고가인 물건은 유럽에서 수입된 벽면 거울이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중앙에 거울의 방이 있는데, 당대에 거울은 엄청나게 비싸고 화려한 사치품이었다. 이에 궁전 중심이자 프랑스 중심을 거울로 장식한 것이다. 이는 외국 사신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도배한 거대한 회랑인 거울의 방을 걷게 함으로써 사절단의 기를 죽여 프랑스의 외교적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고단수의 정치적인 장치였다. 거울이 비쌌던 이유는 베네치아의 일부 솜씨 좋은 기술자들만 제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스에서 이 기술을 빼내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설이 있다. 석조전 접견실에 위치한 거울들은 유럽에서 장식한 형태로 잘라서 직수입하였고, 장기간에 걸쳐 매우 조심스럽게 운반하였다고 한다. 다른 공간에 비해 천장이 낮은 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에 내려 앉았기 때문이다. 1층에 있는 대식당은 보통 마지막으로 거치는 곳이다. 대식당에서 마지막 해설을 하고 중앙홀로 이동하여 관람을 끝낸다.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고급스러운 식탁보, 식기 등으로 관람객들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방이다. 중앙홀 좌측방으로 공식적인 행사 이후 참여자들에게 서양식 만찬을 베풀던 공간이다. 긴 식탁과 여러 개의 의자를 두었다. 배치해 둔 식기들은 그 당시에 실제로 사용하던 것들과 복제품이며, 황실 문장인 이화문이 새겨져 있다. 여담으로 복제품을 만든 회사는 행남자기사이다. 다른 공간과 달리 유일하게 내부 복원이 덜 이루어진 공간이다. 복원 공사 도중에 발견했던 배관 시설의 일부를 놔둔 후 그 앞에 불투명 유리를 두어 관람 시에 해설 요원이 버튼을 눌려 보여줄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석조전이, 외관은 화강암 재질이지만 사실 벽돌과 철골 등으로 지은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1층 소식당은 접견실 좌측방이다. 황실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몇 귀빈들과 단촐하게 식사를 했던 방이다. 대식당에 비해 식탁 크기가 작다. 최대로 쓸 수 있는 인원이 5명 정도다. 방 한 켠에 스푼과 나이프, 포크를 보관하는 보관함을 두었다. 해당 상아 식기는 복원 당시 영국에서 경매로 구해온 것이라고 한다. 방들 중 유일하게 인테리어 마감이, 락커칠을 한 듯한 영국산 오크나무로 만든 판넬링이다. 그래서 미술관으로 바뀐 후에도 귀빈실로 사용하였다. 1시간 이상 되는 심화 해설과 석조전에서 분기별로 진행하는 특별전 때에만 관람이 가능하다. 석조전 2층은 황제와 황후 생활 공간이다.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 및 서재 등이 있다. 황제의 서재, 황후의 거실, 그리고 각각 화장실과 욕실로 분할하고 나머지 공간은 궁인들이 사용했다. 재현실인 침실과 황제의 서재, 황후의 거실 및 화장실과 욕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불침번을 서던 궁녀들이 사용한 방으로 추측할 뿐, 제대로 된 고증 자료가 없어 전시실로 활용한다. 2층 황제의 침실은 말 그대로 대한제국 황제의 침실이다. 서쪽 계단 기준으로 좌측에 있다. 정작 나라가 망한 이후 완공하였고, 무엇보다 고종은 오랫동안 온돌을 기반으로 한 좌식에 익숙했기에 함녕전에 계속 기거하였다. 순종 역시 창덕궁에 살았기에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영친왕이 간간히 귀국할 때만 사용하였다. 벽면의 인테리어는 소식당을 제외하면 같으며 카펫 위로는 침대를 포함해 옷장, 세면대, 의자, 안락의자, 협탁 등이 있다. 이 중 옷장과 세면대는 원래 침실에 있던 것을 다시 배치한 것이다. 황제의 침실이기에 커튼과 소파의 덮개, 침대의 이불자리 등의 색상이 황금색이다. 세면대는 큰 대야에 대형 저그가 겹쳐져 있는 형식으로 요즘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세면대와 다르다. 이는 수도관이 들어오기 전에 유럽 왕실에서 사용하던 방식이다. 황족이 대야에 손을 대면, 위에서 시종들이 물을 부어주는 식이었다. 이를 감안해서 세면대 탁자 상판 부분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나무일 경우 물이 튀어 썩기 쉽기 때문이다. 경복궁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에도 이와 같은 세면대가 있는데, 빌레로이앤보흐 사 제품이다. 황제의 침실을 황제의 서재, 황후의 부드와흐(규방), 황후의 침실, 2층 중앙홀과 차례로 연결하였다. 유럽의 궁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형 구조이다. 이런 왕족의 주거 구조를 현대에 아파트를 만들 때 접목시켰다. 2층에 있는 황제의 서재는 황제의 침실 좌측에 있다. 전통 개념의 사랑방같은 공간이다. 황제가 책을 보거나 별도로 손님을 맞이하던 곳으로 1911년에서 1918년 사이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카펫 위로 책장, 회전서가, 게임탁자, 원탁, 책상 등을 배치하였다. 중앙 원탁 위에 있는 책은 당대 국제법 기초 서적이었던 만국공법이다. 고종황제는 외국 사신들에게 이와 같은 외국 서적들을 부탁하여 입국시 3 ~ 4권 정도씩 가져오게 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고종황제의 행보를 보면, 비록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을 위해 자주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군주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2층 황후의 침실이 있다. 사실 석조전 설계 단계부터 사실상 고종의 황후 역할을 하던 황귀비 엄씨의 침실로 기획하였다. 그런데 석조전을 경술국치 이후 준공하였고, 직후 순헌황귀비가 장티푸스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데다,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마저 남편을 따라 창덕궁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기에, 이 방은 이왕비였던 이방자 여사가 남편 영친왕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에 가끔 올 때만 사용하였다.(1922년 ~ 1924년) 가구 구성은 황제의 침실과 거의 같다. 단, 황후의 침실이라 그런지 카페트 위로 화장대가 있는 것과 커튼이나 방석이 자주색인 것이 다르다. 준공 이후 배치했던 옷장, 세면대, 화장대, 책상을 복원하면서 다시 놓았다. 2층 황후의 거실은  황후가 책을 읽거나 내빈을 접대하는 방이다. 전통적인 안방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황후가 사용하는 공간이기에 다른 방보다 가구가 화려하다. 황제의 거실 좌측에 있으며, 황제의 서재보다 규모가 약간 작다. 인테리어는 황제의 거실과 비슷한 편으로 카펫 위로 책장, 책상, 원탁, 의자, 장의자, 장식장 등이 있다. 이 중 준공 당시 가구는 책장과 책상, 원탁, 장식장이다. 중앙에 위치한 원탁 위에는 영국의 웨지우드 사에서 제작한 티팟 세트가 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욕실은 황제의 서재와 황후의 거실 아래에 위치한 공간들이다. 복원한 화장실 / 욕실은 복원이 한참 진행 중일 때 발견한 평면도에서 해당 위치에 타일이 있다는 근거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성을 구분하는 법도에 따라 황제와 황후 전용을 따로 두었으며, 화장실과 욕실 또한 각각 다른 공간으로 분리하였다. 대한제국에서 수세식 좌변기가 최초로 설치되었다. 그 당시 고종 황제의 황실로 사용되는 건물에 영국식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화장실/욕실 디자인은 대체적으로 같다. 변기나 욕조, 세면대 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쓰던 것들을 그대로 들였다.

덕수궁 내 서양식 건물 건축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역사와 구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덕수궁 석조전 서관)은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게 공개된 이후 황실이 조선미술전람회의 일환으로 조선미술품을 진열할 수 있는 박물관을 짓기로 결정한 결과 설립되었다. 1936년 8월 21일 덕수궁 석조전 기공식을 개최하였는데 당시 총예산 30만 원을 들여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물로서 설계자는 조선은행 건축 감독자로 일한 바 있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담당하였다. 1937년 10월 완공을 목표로 하였으나 1938년 2월에 덕수궁 석조전이 완성되어 건평 356평, 지상 3층, 총 1,929평(3,428㎡)으로 화강암과 인조석을 섞어 의석조로 지었다. 좌우 대칭형 건물로서 중앙부는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이 덧붙여진 형식이다. 창경궁 소장 조선미술품들이 3월 25일부터 옮겨지기 시작하여 5월까지 진열이 완료되었고 이후 덕수궁 신관은 이왕가박물관, 구관은 덕수궁미술관(현 석조전)으로 불렸다. 광복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이후 유엔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이 사용하였다. 1954년 이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73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전함으로써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신축 이전한 후 국립국어연구원이 입주하여 사용하다가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개관하여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1938년 개관한 이후 최초의 근대식 박물관 건물로서 많은 전시가 개최되었다. 초기에는 조선시대 미술품이 전시되었으나 1945년 해방기념문화대축전미술전람회를 시작으로 하여 1950년대 이후 현대 미술 전시회가 개최되어 한국근현대미술사의 흐름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개최됨에 따라 아카데믹한 화풍을 형성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지만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반대하는 ‘1960년 미술가협회’, ‘벽동인’의 작가들이 덕수궁 벽에 자신들의 작품을 걸어 기성 미술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설립되면서 개최된 ‘다시 찾은 근대미술’을 시작으로 하여 2002년 ‘소정, 길에서 무릉도원을 보다’, 2003년 ‘드로잉의 새 지평전’, 2005년 ‘김종영’, 2007년 ‘남농허건’, 2009년 ‘권진규’, 2010년 ‘아시아 리얼리즘’, 2012년 ‘이인성’ 등과 같은 전시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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