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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덕수궁의 서양식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3-2]

by 또바기벗 202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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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이번 글에서는 덕수궁 내 서양식 건축물인 중명전, 돈덕전을 알아보겠다. 중명전(重明殿)은 덕수궁에 딸린 서양식 전각이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중명(重眀)' 뜻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또는 '거듭하여 밝다'이다.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이름이다. 다만, 상술했듯 이곳에서 망국을 알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이름이다. 발음이 비슷한 준명당과 헷갈려하여 준명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 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 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날 일(日)'이 아닌 '눈 목(目)'이 들어가 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며,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 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日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이런 거짓 정보에 속지 말자. 돈덕전은 경내 석조전 뒤에 있었던 건물이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돈덕전도 그중 하나이다. 우크라이나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돈덕(惇德)' 뜻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이다. 《서경(書經)》의〈순전(舜典)〉에서 유래했다. 현판 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모아서 만들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덕수궁의 서양식 건축물 중명전의 역사와 구조

중명전의 역사 : 원래 덕수궁 궁역(宮域)이 아니었다. 1884년(고종 21년) 11월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마련한 곳으로, 이 일대는 알렌의 집 말고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1886년(고종 23년)부터는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거처로 변모했고 1887년(고종 24년)에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여성 교육기관인 정동여학당(현재의 정신여자고등학교)을 세웠다. 정동여학당은 1895년(고종 32년)에 연지동으로 옮겨갔고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덕수궁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을 지었다. 이때 미국인 건축기사 다이가 설계감리를 했다고 한다. 정확한 완공일자는 모르나 1898년(광무 2년) 1월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는 주한일본공사관의 기록을 보아 그 무렵에 완공한 듯하다. 수옥헌 건립 이유를 고종의 미국 의존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친러파와 러시아 외교관들이 도리어 고종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전임연구원 장경호에 따르면, 러시아에 부담을 느낀 고종은 덕수궁 환궁 전후로 해서 더욱 미국 의존도를 높였고 여러 번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할 의도를 비공식적으로 내비쳤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고종이 차선책으로 미국공사관 바로 옆에 임시 피난처 개념으로 왕립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경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수옥헌은 완공 이후 도서관으로서 수많은 황실의 서책들과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독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친왕 접견 등 외국의 주요 인사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1901년(광무 5년) 11월 16일에 수옥헌 일곽의 건물 한 채에서 불이 났다. 불은 삽시간에 수옥헌으로 번져 수옥헌은 소실되고 말았다. 화재 이후 러시아 제국 국적의 우크라이나인 건축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ій Іванович Середін-Сабатін)의 설계 감리 하에 재건했다. 이때 지금의 2층 벽돌 건물로 바꾸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덕수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편전 겸 침전으로 활용했다. 이후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할 때까지의 약 3년 동안 사실상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황궁 기능을 담당했다.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 을사조약을 여기에서 강제체결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꾼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명전 이름이 공식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1906년(광무 10년) 11월(음력 9월) 이후인 것을 보아 그 무렵에 바꾼 듯하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덕수궁 궁역 축소화에 따라 덕수궁 궁역에서 분리당했다. 경성구락부가 인수하여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활용했다. 1925년에는 조리실의 화재사고로 외벽을 제외하고 전부 불탔으며 이후 재건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국가가 소유 및 관리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과 공산당이 사용했다가 수복 이후 다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소유했다.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에게 중명전 사용권을 이양하여 영친왕 부부가 소유했다가 영친왕이 사망한 이후 다시 민간에게 위탁, 매각했다. 그러면서 점차 역사성을 상실하며 일반 점포로 전락했다. 1983년에 서울특별시청에서 시장령에 따라 중명전을 인수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했고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했지만, 앞뜰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건물 지하는 폐건물처럼 방치된 모습이 2006년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방영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소유했고 2007년 2월에 사적 124호 지정으로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했다. 이후 고증을 통해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대로 복원해 2010년 8월에 일반에 개방했다. 2016년 8월부터 오래된 시설을 보수하고 20세기 초 권역의 평면도를 검토해 당시 지반 높이를 반영시키고 석축과 계단을 복원하여 11개월의 공사 끝에 2017년 7월에 민간에 재공개했다.

중명전의 구조 : 현재는 을사조약 및 대한제국 국권회복을 위한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1층에 제1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실 '을사조약의 현장', 제3실 '을사조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등 총 4개 실로 전시실을 구성했다. 1전시실에서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개항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명전과 덕수궁 권역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2 전시실에서는 당시 의복을 고증해 입힌 극사실 인물모형들을 사용해 을사조약 체결 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체결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근택의 복장에 고증 오류가 있는데, 부장 상복의 카라에는 별이 2개가 아닌 3개가 있어야 한다. 3 전시실에서는 을사조약 체결 전후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외 조약 체결 반대의 움직임을 구현했다. 4 전시실에서는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대한제국 특사들의 활동을 각종 영상으로 재구성했다. 2층에는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맞았다는 알현실이 있다. 같은 층에 문화유산 국민신탁 사무실도 같이 위치해 있어 개방을 안 했지만, 2017년 말부터 알현실에서 특별전을 열어 개방한다.

덕수궁의 서양식 건축물 돈덕전의 역사와 구조

돈덕전의 역사 : 처음에는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영역이 아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이 관장하던 해관의 한옥 청사가 있었다. 그러다 1901년(광무 5년) 경에 경운궁으로 편입된 듯하다. 그러나 궁내 주요부 영역과는 떨어져 있었다. 이후 기존의 해관 건물을 철거한 뒤 새로운 양관 공사를 시작했다. 이 새 양관이 바로 돈덕전이다.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 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공사의 진척 속도가 많이 더뎠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옥헌이 불타자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야 다시 진행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후 언제 완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성신문》 1903년(광무 7년) 4월 6일 자 기사에 칭경예식 장소와 관련하여 돈덕전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완공했고 이름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치렀어야 할 칭경예식 행사를 1903년(광무 7년) 4월까지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계획한 날에 열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 이유로 미뤘다가 결국 영원히 개최하지 못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대화재 때 다른 주요 건물들은 불 타 사라졌지만 돈덕전은 무사했다. 이후 돈덕전은 황실과 정부에서 수옥헌과 함께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한 예로, 1906년(광무 10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묵는 일종의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다. 궁궐에 외국인 숙소가 있는 게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애당초 외국인과 교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하면 크게 의아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1905년(광무 9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5년(광무 9년) 11월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 경관들이 머물며 경운궁을 감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 순종은 이곳으로 이어하려 했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하고 대신 즉조당으로 이어했으며 돈덕전은 신하들과 일본 관리들이 황제를 배알 하러 오는 장소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덴노)가 방한했을 때에는 상견례와 회식을 하는 곳으로 활용되었고, 11월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고종이 외부인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1910년에 석조전을 완공하고 서쪽 궁장을 확대하면서, 돈덕전은 비로소 덕수궁[9] 주요부 영역으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의 탄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가 열렸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비었고, 돈덕전은 방치되었다. 그 후 없어졌는데 정확한 때는 모른다. 다만, 1921년 7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저 때까지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6년에 경성부 시내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돈덕전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철거된 듯하다. 1930년대에는 돈덕전 터에 아동 유원지가 들어섰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덕수궁관리소와 강당이 세워졌다. 문화재청은 2017년까지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2018년부터 설계 및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1년 연장되어 2022년 8월 말에 완공될 예정이었다가 12월 말로 연장되었다가 또 2023년 하반기로 연장되었다. 비용 때문인지 몰라도 원래의 석조가 아닌 철골로 공사 중이다. 사실 내부 구조가 평면도 하나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훗날 더 자세한 설계도라도 발굴된다면 내부를 수정할 수 있게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가 내부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이면 아예 건물을 다시 해체한 후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복원은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다 보니 논란은 있다. 2023년 1월 기준으로 외관은 완성되었다. 복원 조감도하고 다르게 창틀의 색이 녹색이다. 복원 후에는 대한제국 관련 자료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돈덕전의 구조 : 돈덕전 외관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만들었으며, 벽돌 쌓기 양식은 중명전, 구성헌과 동일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은 중명전과 달리 붉은 벽돌은 창문 사이의 벽에만 쌓고, 주로 회색 벽돌의 비율이 높았다. 문화재청에서 2016년에 제작한 《덕수궁 돈덕전 복원 조사 연구》에 따르면, 길이 약 127척, 폭 95척, 건평 약 350평, 연 700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함석지붕으로 앞뒤에 서로 크기가 다른 튜렛[12] 3개를 세워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을 절충한 형태를 띄게 했으며, 남면에는 1, 2층 모두 발코니에 아케이드를 장식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돈덕전 내부의 모습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각 실의 용도가 표기된 평면도가 있다. 순종황제의 즉위식 안내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목수현 박사가 《법규유편(法規類編)》이란 책에서 발견했다.# 군주가 착좌 하는 어탑이 북쪽에서 남면 하지 않고 동쪽에 있는 다소 특이한 구조다. 《조선병합사》에서 돈덕전 내부를 묘사한 기록이 있다. '100평 넓이의 홀에 대원주 6본이 서있으며, 대원주마다 금색 용 조각이 새겨져있고, 서벽과 창은 홍색 및 황색 금수로 치장해 두었으며 옥좌, 탁자, 교자 등은 금색 찬란했다.'라고 적혀있다. 최근 연구에 따라 돈덕전 내부에 있던 가구들 중 일부는 현재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920년 희정당 중개축 당시 돈덕전에서 가구들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가구를 배치했던 방의 위치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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