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저번에 작성했던 덕수궁 내조 영역 내 건축물 중 남은 두 건축물인 함녕전과 정관헌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에 있는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침전이다. 1897년에 지어졌으며, 1904년 함녕전에서 시작된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1906년에 재건되었다. 1985년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함녕(咸寧)’ 뜻은 ‘모두(咸)가 평안하다(寧)’이다. 《주역(周易) - '건(乾)' 괘 단사(彖辭)》에 나오는
“만물에서 으뜸으로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열강이 각축하던 시절에 국가 간에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듯 하다. 정관헌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경운궁에 있는 건축물로서, 전통과 서양 건축 양식이 절충된 형태이다. 휴게 시설로 지어졌으나 경운궁은 궐내에 전각이 충분히 많지 않은 상태에서 황궁이 되었기 때문에 선원전(璿源殿)이나 경운궁 화재 등으로 전각이 소실되었을 때는 정관헌을 다른 용도로 전용하기도 하였다. 1900년(광무 4) 선원전이 화재로 소실되고, 새로운 선원전을 건설하는 동안에 정관헌에는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진을 모시기도 하였다(『고종실록』 38년 2월 5일). 정관헌은 서양식 건축의 공간 구성을 근간으로 벽돌로 지어졌으며, 전통 건축의 지붕 형식과 장식이 사용된 건축이다. 정관헌의 ‘정관(靜觀)’의 뜻은 '조용히(靜) 내다 본다(觀)'이다.
덕수궁 내조 영역 내 건축물 함녕전의 역사와 구조
함녕정의 역사 : 1897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에는 아직 함녕전이 지어지지 않아 즉조당을 침전으로 사용했다. 즉조당이 협소하여 침전으로 사용할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고, 같은 해 6월 19일 상량문제술관으로 윤용선을 임명하는 등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경복궁에 있던 건물인 만화당(萬和堂)을 이건하여 이를 개수하여 건설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궁궐지》에는 36칸의 만화당 건물을 경운궁으로 이건하였다 설명하는데 만화당과 함녕전의 전각 규모와 문의 배치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정원일기》, 《매천야록》 등을 근거로 옮겨진 만화당 건물은 어진봉안처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지어진 함녕전은 1904년에 아궁이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된다. 이 때 발생한 불은 경운궁 중심을 덮쳐 당시 중층으로 지어진 중화전, 선조때부터 전해져오던 건물인 즉조당과 석어당을 모두 파괴한다. 따라서 다시 지은 함녕전은 1904년 음력 3월에 주춧돌을 올렸고 8월에 기둥을 세운 뒤 12월에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을 마쳤다. 이 때 전체적인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여기서 사망하자 빈전과 혼전을 함녕전에 마련하였고 혼전은 효덕전(孝德殿)이라 하였다. 3·1 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였던 군중 일부가 대한문을 통해 들어와 효덕전에 참배하고 만세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2009년에 행각을 복원하였고 2019년에 광명문을 원래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함녕전의 구조 : 1층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했다. 잡상의 수는 7개이다. 평면은 ‘ㄴ’자 형태이다. 또한 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기둥을 세운 뒤, 쇠서 1개만 둔 몰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강녕전과는 달리 중앙에 월대 없이 5단 짜리 계단만 3개를 설치했으며 뒷면에는 대청과 통하는 쪽은 계단 1개를,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엔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 씩의 계단을 두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북쪽에 온돌방 4개를 덧붙여 총 40칸 규모이다.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했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2칸, 측면 2칸을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의 협칸과 측면의 칸들을 마루로, 뒷면의 협칸은 쪽방으로 구성했으며 온돌방도 대청과 마찬가지로 벽체를 치지 않고 전부 한 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했다. 대청과 온돌방을 연결하는 문은 중앙에만 창호를 두고 그 위 아래로 종이를 바른 불발기 양식으로 설치했다. 다른 궁궐들의 메인 침전은 일반적으로 다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건물인데 반해,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고, 대부분 쇠서가 2개인 이익공 공포인데 반해 함녕전은 쇠서 1개를 둔 몰익공 공포이다. 사실 앞서 말했듯 경복궁의 수많은 그저 그런 전각 중 하나인 만화당을 옮겨다 지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처음부터 정식 침전으로 지은 강녕전, 대조전 등과 비교해 구조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옮길 때 용마루를 빼도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대로 놔둔데엔 두 가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무량각 건물이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건물이라 함부로 뺐다간 공사가 더욱 힘들어졌을 것이고, 또 하나는 이게 중국 양식이라 그런 선진 기술을 귀하신 왕과 왕비의 침전에만 적용한 것인데, 이미 여러 서양 문물을 접하고 자주 독립국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굳이 중국풍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근대 시기에 지어서 그런지 서구적인 요소가 더럿 보인다. 대청 천장엔 샹들리에가 2개나 걸려있고, 대청 문틀마다 커튼 박스를 달았으며 지금은 치웠지만 대청과 툇간 바닥에 카펫도 깔았었다.
함녕전의 행각 : 남행각은 전면 16칸인데, 왼쪽에서 7번째부터 3칸은 치중문이고 그로부터 3칸 건너뛰어서 한 칸은 평강문으로 추정한다. 서행각에는 향복당과 풍안당이라는 당호가 있었고, 문도 한 칸 있었다. 북행각은 정면 9칸 규모의 만희당이 있었으며 문도 한 칸 있었다. 민도리형식으로 지어졌으며, 홑처마로 구성되었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이었다. 북측행각 바깥에 1913년 구여당(九如堂)을 지으며 규모가 확장되었고, 복도를 조성하였다.
함녕전의 정문 광명문 : 광명문(光明門)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다. 1897년에 지었다가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해 12월에 재건되었다. 이후 일제시대에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고 이왕가미술관을 지을 때 광명문을 미술관의 남쪽으로 이전했다.신기전,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가 여기서 전시되었다. 2016년 광명문을 제자리로 이전하기 위해서 문화재청이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광명문과 배치형태가 같은 건물지 1동을 확인하였다. 건물지는 12기의 적심시설을 가진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지로, 경운궁 중건 배치도(1910년) 상의 광명문지와 그 위치와 배치상태 그리고 평면형태가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광명문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를 통해 2018년 원래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덕수궁 내조 영역 내 건축물 정관헌의 역사와 구조
정관헌의 역사 : 정관헌은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경운궁 내의 여느 서양식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건축 경위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건축가가 누구인지, 언제 지어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용도로 지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당시 대한제국의 국제 관계와 정부에서 고용했던 서양인의 활동을 감안할 때 러시아인 사바틴([薩巴丁], A.I Sabatin)이 설계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경운궁 내 정관헌은 침전인 함녕전과 편전인 덕홍전 뒤에 위치해 있다. 비록 궁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언덕에 있는 까닭에 그 이름의 뜻처럼 휴게 시설로 사용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관헌이 갖고 있는 현 입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보인다. 하나는 궁궐 내에 지어진 다른 서양식 건축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건축 생산 시스템과 조직에 의한 건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정관헌이 황제의 사적인 공간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관헌이 지어진 연도도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1897년(광무 1)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04년(광무 8)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을 때, 고종이 즉조당(卽阼堂)과 석어당(昔御堂)만 남아 있던 옛 경운궁을 수리하여 대한제국의 황국으로 중수했다는 회고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01년(광무 5) 2월 5일에 태조의 어진을 정관헌에 모시라는 고종의 명이 있으므로, 정관헌은 1897년과 1901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정관헌은 경운궁에 지어진 다른 서양 건축물에 비해 비교적 옛 사진 자료가 몇 장 남아 있는 편이다. 그러나 정관헌에 관한 모습을 제대로 그려 내기에 충분하지는 않다. 정관헌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1902년(광무 6) ~ 19 04년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운궁 전경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는 팔작지붕 형태의 정관헌 모습이 일부 보이며, 지붕 외곽에 높이가 낮은 처마가 둘러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존하는 정관헌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는 정관헌이 신축 당시에도 베란다가 설치된 건축이었음을 의미한다. 정관헌과 같은 서양 건물에 설치된 베란다는, 유럽 국가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며 고온다습한 식민지 기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서양 건축 양식을 새롭게 변형한 형태이다. 대한제국기의 서양 건축물에 베란다가 등장하는 것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베란다 건축 양식이 청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관헌의 변화를 알려 주는 중요한 사진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오카다 미츠구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에 따르면, 정관헌은 지금과 같은 기둥과 개부부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벽돌로 둘러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시기를 알 수 없는 때에 외부 벽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한 시점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938년 이왕직(李王職)에서 발행한 『덕수궁사(德壽宮史)』에 실린 정관헌 사진에 이미 기둥으로 교체되고 기둥 사이에 벽체가 없는 사진이 실려 있어, 1938년에는 이미 모습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에 정관헌은 찻집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 사이에 벽돌 벽체가 있고 벽돌 벽체에는 여닫이 창호가 설치되었다. 정관헌의 두 번에 걸친 변화 중 근본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는 벽돌 벽체에서 기둥으로의 변화는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추측은 가능하다. 1919년 고종황제가 서거한 후 이왕직에 의해 덕수궁이 관리되면서 1932년에 덕수궁의 중앙공원화가 진행되었다. 이때 많은 전각이 해체되었고, 석조전(石造殿) 등이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정관헌도 덕수궁의 중앙공원화와 함께 모습이 변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관헌의 구조 : 정관헌은 큰 홀을 중심으로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되고, 후면에는 부속실이 배치되어 있는 단순한 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간적 명료함에 비해 양식적 특징은 간단하지 않다. 정관헌의 외벽은 붉은 벽돌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으로 구성되었고, 지붕은 전통 건축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다. 건축물의 외벽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 베란다 난간에는 콤퍼지트 양식[composite order]의 기둥이 사용되었다. 지붕의 재료와 구법은 양식 건축을 따르고 있지만, 베란다의 난간에는 박쥐와 소나무 등 전통적인 문양이 투각된 장식으로 구성되어 한식과 양식이 절충된 특징을 갖고 있다.중앙의 주출입구와 양 측면에는 계단이 위치하는데, 계단으로 지상부에 올라온 만큼 지하층이 상부로 돌출되어 있다. 주출입구 바닥에는 타일을 사용하였다. 정관헌 타일은 중명전의 타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두 곳의 타일 디자인 패턴은 매우 유사하다. 정관헌의 내부는 큰 하나의 홀과 뒷면에 위치한 부속실로 구성되었다. 경운궁에서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정관헌에서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의 정관헌의 이러한 입지 특성이 반영되어 3면이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촬영 시기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관헌’이라는 현판이 보이는 한 사진에는 벽돌로 만든 벽체가 존재하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외벽체가 개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정관헌을 둘러싸고 있는 베란다는 나무로 만든 서양의 콤퍼지트 양식 기둥과 소나무와 사슴 등 우리의 전통적인 문양이 장식된 난간으로 둘러쳐져 있다. 건물의 본체는 벽돌 벽체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기둥으로 둘러 싸였다. 돌처럼 보이는 기둥은 시멘트 물 씻기 기법에 의해 돌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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