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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덕수궁 내조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2-1]

by 또바기벗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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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과 즉조당>

저번글에 이어 덕수궁의 내의 건축물 중 내조 영역 내 건축물에 대해 알아보겠다. 덕수궁의 내조 건축물에는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 덕홍전, 함녕전, 정관헌이 있다. 이번글에서는 내조 영역 내 건축물 중 준명당과 즉조당에 대해 알아보겠다. 준명당은 석조전의 동쪽, 중화전의 서북쪽에 있으며 즉조당과는 복도로 이어져있다. 현판 글씨는 의정부찬정 박제순이 썼다. 준명당에서 '준명(浚眀)' 뜻은 '다스려 밝힌다', 또는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이다. 《서경(書經) - 고요모(皐陶謨)》 편에 나온 구절인 “날마다 세 가지 덕을 밝혀, 밤낮으로 소유한 집을 다스려(浚) 밝힌다(眀)."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조당은 인조가 왕으로 즉위한 곳이다. 영조가 후에 이곳을 들러 인조가 왕으로 즉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계해 즉조당(卽祚堂)’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게 함으로써 이름이 생겨났다. ‘계해 즉조당(卽祚堂)’의 뜻은 ‘계해년에 즉위한 임금이 곧 인조’라는 뜻이다. 

현판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다.

덕수궁 내조 건축물 준명당의 역사와 구조

준명당의 역사 :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초기 경운궁에 준명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준명당은 1904년에 발생한 경운궁 대화재 이후 재건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현재 준명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건축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준명당이 아닌 다른 당호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건축물의 당호로 현재까지 알려진 것에는 경운당, 덕경당, 관명전이 있다. 이들 당호는 모두 1910년(융희 4) 이후에 등장하며 이전에도 이곳에 건축물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으나,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다만 정전인 즉조당(卽阼堂) 왼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편전의 역할을 담당한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에 해당하는 건물로 청목재(淸穆齋)를 추측할 수 있다. 경운당은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에 묘사된 「경운당도(慶運堂圖)」를 볼 때 준명당 위치에 존재했던 건물임이 분명하다. 「경운당도」에 묘사된 경운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평면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즉조당과는 담장 및 행각으로 구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덕경당과 관련된 내용은 『고종실록』 등에 등장한다. 이때 영건도감에서 덕경당을 새롭게 중건했는데 전호를 관명전으로 했다(『고종실록』 39년 10월 18일). 새롭게 만들어진 관명전의 모습은 『[임인]진연의궤([壬寅]進宴儀軌)』의 「관명전도(觀明殿圖)」를 통해 알 수 있다. 관명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평면인데, 관명전은 경운당과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즉 경운당에서 덕경당으로, 덕경당에서 관명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때 기존 건물보다 규모를 크게 하다 보니 즉조당과의 사이에 있던 담장 및 행각은 사라지게 되었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에 화재가 발생했다.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咸寧殿) 온돌을 수리하던 중 불이 다른 곳에 옮겨 붙어 대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대화재 이후 각 건물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준명당이 건립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준명당은 전면에 행각을 갖고 있고, 서쪽에 화초장 19칸이 만들어졌으며, 북쪽으로 즉조당과 더불어 화초장 29칸이 만들어졌다. 즉조당과의 사이에 담장을 구성하지는 않았고,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했다. 건물의 평면은 기존의 건물과 다르게 ㄱ자형으로 구성했는데, 중건 당시 경운궁의 많은 건물이 ㄱ자형 평면으로 변경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일제강점기 초에는 고종이 외동딸 덕혜옹주를 위해 만든 유치원이 되었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1933년 일제의 궁궐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덕수궁의 전각이 헐렸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준명당의 구조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 하나를 길게 두었다. 기단의 동쪽 측면은 기단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으나 서쪽 측면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동북쪽에 덧대인 방 4칸을 더해 총 22칸이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서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그 옆에 2칸이 대청, 그다음 온돌방 1칸, 마지막으로 제일 동쪽에 누 마루 1칸이다.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는 툇마루가 깔려있으며 동북쪽 4칸짜리 방은 온돌이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고 '복 복(福)'자를 써넣어 황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했다. 서쪽 온돌방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다. 동온돌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으로 중간에 기둥을 두고 기의 동, 서, 남쪽으로 문지방을 두었다. 다만 동온돌의 북쪽 2칸과 동북쪽 온돌의 서남쪽 방은 서로 트여 '」' 자 평면을 이룬다. 동북온돌 4칸 중 동남쪽 방은 다른 방과 문지방으로 나누었고, 나머지 칸은 서남쪽 방을 제외하고 텄다. 바깥 창호의 경우,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 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정면의 온돌방 바깥 칸과 뒷면의 가퇴 부분은 정(井)자 살이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뒤로 나가는 문짝은 화려한 아(亞) 자 살이고, 온돌방의 창호는 전부 용(用) 자 살이다. 다만, 동, 서 양 온돌방에서 뒷면의 툇간으로 나가는 문은, 가운데는 정(井) 자 살로, 위와 아래는 용(用) 자 살로 서로 다르다.

덕수궁 내조 건축물 즉조당의 역사와 구조

즉조당의 역사 : 즉조당은 경운궁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이었다. 즉조당은 선조가 환궁해서 정릉동 행궁에 머물 당시부터 경운궁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선조의 침전으로 사용했다. 경운궁에서는 광해군과 인조가 왕으로 즉위했다. 광해군은 당시 다른 궁궐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정릉동 행궁, 즉 경운궁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반면 인조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광해군은 말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감금하여 폐위시켰다. 이런 이유로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대의명분에 맞게 인목대비가 감금되었던 경운궁에서 즉위한 것이다. 이때 인조가 즉위한 건물이 즉조당이다. 즉조당이라는 당호는 영조대에 붙여진 당호이다. 1769년(영조 45) 영조는 경운궁에 들러 남겨진 두 채의 건물을 둘러보고 ‘양조개어(兩朝皆御)’,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라는 친필을 남기고 이것을 현판으로 만들어 걸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5년 11월 2일). 영조는 1773년(영조 49)에 ‘석어당(昔御堂)’이라는 세 글자를 직접 써서 즉조당에 걸도록 하기도 있다(『영조실록』 49년 11월 4일). 영조 승하 이후에도 왕들은 즉조당을 때때로 찾았다. 1893년(고종 30년) 10월에 고종과 왕실은 선조의 환궁 300주년을 맞아 즉조당에서 기념행사를 했다. 고종대에 들어 1896년(고종 33)부터 경운궁을 중건하기는 했지만 경운궁에 마땅한 정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즉조당은 경운궁의 정전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1897년(광무 1) 10월 9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이 모든 행사가 즉조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이틀 전에 즉조당은 전호를 태극전(太極殿)으로 변경하였다(『고종실록』 34년 10월 7일). 건축물의 등급을 황제 즉위에 적합하게 당(堂)에서 전(殿)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이름 붙여진 태극전은 1898년(광무 2) 2월 13일에 다시 중화전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경운궁의 정전 역할을 담당하였다(『고종실록』 35년 2월 13일). 1901년(광무 5)에는 경운궁에 새로운 정전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법전(法殿)은 즉조당 전면 마당에 즉조당과 같은 축으로 건립되었다. 새롭게 건립한 법전을 중화전으로 명명하고, 옛 중화전은 원래대로 다시 즉조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종실록』 39년 5월 12일).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즉조당도 소실되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즉조당은 곧바로 중건이 진행되어 다른 어떤 건물보다 일찍 복원되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22일). 즉조당을 중건하면서 고종은 간가(間架) 제도를 간단히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즉조당의 몸채는 화재 이전의 모습과 거의 같게 만들어졌다. 즉조당 중건 이후 즉조당에서는 별다른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1년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가 이곳에서 서거하였다. 순헌귀비 엄씨는 영친왕의 어머니로 을미사변 이후 실제적인 왕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즉조당의 구조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을 3세트 두었다. 기단의 서쪽 측면은 기단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으나 동쪽 측면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뒷면의 외관은 앞면과 꽤 차이가 있다. 기단부터 다른데 지형의 특성 상 뒷면 기단은 장대석 1벌대이다. 그리고 동, 서 온돌방 바깥 칸에 각각 가퇴를 설치했으며 양 가퇴 사이에 쪽마루를 설치했고 마루의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 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으로 양쪽으로 각각 10개씩 있다. 난간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만한 빈 공간이 있으며 이 앞에 2단의 댓돌이 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총 21칸이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서쪽)의 1칸은 마루로 되어있고, 그 옆에 2칸이 온돌방, 그 다음 대청 3칸, 마지막 제일 동쪽의 1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 툇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고 청룡과 황룡을 그려 넣어 화려하게 꾸몄다. 서쪽 협칸에 준명당으로 갈 수 있는 복도가 있다. 동쪽 온돌방은 이론 상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나 모든 공간을 1칸으로 트여 넓게 방을 쓸 수 있게 했다. 대청 쪽으로는 샛기둥을 두고 분합문을 설치했다. 서쪽 온돌방은 약간 다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으로 칸 수부터 차이가 나고, 방을 1칸으로 튼 것, 대청 쪽으로 분합문을 둔 것은 동온돌과 같다. 그러나 중간에 기둥을 두고 기둥 남쪽으로 문지방을 둔 것은 다르다. 바깥 창호의 경우, 정면의 온돌방 바깥 칸과 뒷면의 가퇴 부분은 정(井) 자 살이다. 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띠살이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뒤로 나가는 문짝은 화려한 아(亞) 자 살이고, 서온돌에서 측면의 툇간과 연결되는 창의 경우 정(井) 자 살이다. 동, 서 양 온돌방에서 뒷면의 툇간으로 나가는 문은, 가운데는 정(井) 자 살로, 위와 아래는 용(用) 자 살로 꾸몄다. 나머지는 전부 용(用) 자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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