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설명했듯이 덕수궁은 기구한 운명을 가진 곳이다. 위 사진을 봐서도 알겠지만 덕수궁 내에는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도 포함되어 있다. 덕수궁 내부는 크게 네 영역으로 구분된다. 궁문과 외조, 내조 그리고 서양 건물의 영역으로 나뉜다.
오늘은 덕수궁의 궁문과 외조 영역 내 건축물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덕수궁의 궁문 건축물에는 대한문이 있고, 외조 건축물에는 중화문과 중화전이 있다. 대한문(大漢門)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이다. 19세기말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대안문(大安門)이었다. 현재 서울시청 앞 광장을 바라보고 서있는데, 원래 위치는 태평로 중앙선 부근이었던 것을 뒤로 옮긴 것이다.
1904년까지 경운궁(현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동년 4월 25일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중화문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정문이다. 대한문으로 들어와 일직선상으로 있는 금천교를 건넌 뒤 조원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되어있는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덕수궁은 원래 궁궐이 아닌 곳을 확장하며 지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5대 궁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창건했으며 조선국 시절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정문으로 세운 문이다. 이름의 뜻은 ‘중화전의 문’이다. ‘중화(中和)’ 자체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의미로, 《중용(中庸)》에서 따왔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중요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던 곳이다.
조선의 5대 궁 정전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창건했으며 처음부터 조선 왕궁의 정전이 아닌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세운 건물이다.
덕수궁 궁문 건축물인 대한문의 역사와 구조
대한문의 역사 : 경운궁이 정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관파천 이후이다. 이전까지 경운궁은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아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아있었는데, 1896년 고종의 지시로 개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했는데, 1896년 11월 19일에 민병석을 인화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하는 등 1896년 경운궁을 개수할 때 착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화문의 위치는 덕수궁 남쪽이었는데, 정전인 중화전의 건설을 염두에 두고 중화전과 정문을 일직선상에 놓기 위해 설계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화전의 착공은 1901년에 이루어졌으며, 완공 전까지 고종은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泰極殿)으로 바꾸어 정전 대용으로 사용했다. 경운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의 영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898년 6월 26일에 민병석을 현판서사관으로 임명한 사실이 확인되어 그 즈음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본다. 이후 1899년 3월 3일에 현판을 올리고 월대 공사를 시작했다. 월대는 궁궐의 정문만이 갖출 수 있는 부속으로, 대안문은 처음부터 정문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1902년 6월에 대안문 안에 연지(蓮池)를 조성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등 대한문 권역의 공사는 1902년까지 지속되었다. 1902년에 삼문체제를 갖추기 위해 중화문과 조원문(朝元門)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대안문과 중화문 사이를 잇기 위해 조원문을 동측으로 틀어 짓기 시작했다. 외문인 조원문의 방향이 틀어짐에 따라 경운궁의 경복궁처럼 전형적인 남북방향 축이 아닌 창덕궁처럼 동서의 축을 갖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중화전과 중화문을 1906년에 개축할 때 대안문도 수리했다. 고종은 양력 4월 25일에 대안문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하라는 칙서를 내렸고, 이후 대안문을 수리하며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수리 시작부터 상량까지는 총 12일이 소요되었다. 상량과 함께 이근명이 지은 상량문을 올렸는데, 상량문에서는 "한양이 억만 년 이어갈 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漢都奠萬億之基, 門號特揭) 하였다. "중화문을 법전으로, 대한문을 정문으로"(中和法殿乃立大漢正門) 삼으며, 이때 "소한(霄漢)과 운한(雲漢)의 뜻을 취한 것"(取霄漢雲漢之義)이라며 한(漢)은 하늘을 의미함을 분명히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태평로를 확장하며 대한문의 이전이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3·1 운동이 열렬히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1919년 고종이 1월 21일에 승하한 후 그 빈전과 혼전을 덕수궁 함녕전에 마련하였고, 인산일을 3월 3일로 잡았다. 따라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은 군중의 한 갈래는 보신각을 지나 숭례문으로 향한 반면, 나머지 한 갈래는 매일신보 사옥을 지나 대한문으로 향하였다. 시위대 선봉에 있던 사람들은 대한문으로 들어가 함녕전에 마련된 고종의 혼전에 세 번 절하고 만세를 계속하였다. 1968년 2월에는 태평로를 확장할 때 문화재관리위원회는 대한문을 후퇴시키기로 결정하였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궁장들은 옮겨졌기 때문에, 대한문은 태평로 중앙에 섬처럼 남게 되었다. 이후 1970년 11월에 33미터 뒤로 이건하여 현재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대한문의 구조 :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이다. 다포식 공포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공포는 외이출목과 내삼출목으로 짜여있고, 안쪽 공포의 판형 부재 끝에는 구름모양을 조각했다. 기둥은 세 줄로 평주(平柱)로 되어있다. 가운데 칸의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서까래를 드러냈으며, 양쪽 칸의 천장은 소란반자로 마감하였다. 겹처마 구조이다. 현재의 현판은 남정철이 썼다.
덕수궁 외조 건축물의 역사과 구조
중화전의 역사 :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 및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몸을 의탁했던 고종은 1년 뒤 1897년(건양 2년) 환궁하면서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창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즉조당은 너무 좁았고, 규모 있는 정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 선포 이후 5년이 지난 1902년(광무 6년)에야 정식 정전으로 지은 건물이 중화전이다. 창건 당시에는 2층이었으며, 겉모습이 창덕궁 인정전과 상당히 흡사했다. 1904년(광무 8년) 대화재로 불탄 이후 1906년(광무 10년) 중건했는데 이전과 달리 단층으로 지었다. 이 곳에서 일어난 중요 행사는 1907년(광무 11년) 1월에 치러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 순정효황후의 결혼식과 1907년 7월에 열린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는 의식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33년에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고 잔디와 꽃을 심는 등 훼손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80년대 말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중화전의 구조 : 5칸(61.4척), 측면 4칸(58척), 총 20칸이다. 2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에 높직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다. 건물 내 · 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게 했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식이다.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런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 중 가장 마지막인 모습이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 분합문을 달았다. 내부는 전부 한 공간으로 뚫려 있다. 정면 기준 가운데 칸 북쪽에 당가와 옥좌를 두었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했다. 처음부터 대한제국의 황궁 정전으로 지었기 때문에 답도에는 쌍용이 새겨져 있다. 즉, 용 2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한 마리는 4 조룡 다른 한 마리는 5 조룡이다. 이 용들은 각각 조선과 대한제국을 상징한다. 또한 내부 천장에도 봉황이 아닌 용이 달려있다. 정전의 격과 맞지 않게 중화전을 감싸는 행각이 없다. 일제강점기 공원화 작업 당시에 조성한 석조전의 정원이 중화전 행각을 침범하기 때문에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중화전 뜰 동남쪽 모퉁이에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모습이 많이 달라져 현재는 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중화문의 역사 :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이후, 석어당, 즉조당 및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1년 뒤인 1897년(건양 2년) 환궁할 곳으로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기간도 길어졌다. 그래서 한 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했다. 그래도 명색이 제국인데 민가나 다름없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계속 쓰기엔 좁기도 하고 폼도 안나서 정식 정전 건물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기존의 경운궁 영역은 너무 좁아서 궁역을 넓혀야 했다. 그래서 그나마 여유 공간이 있던 남쪽으로 궁역을 확장한 뒤, 즉조당과 남쪽 궁장 사이에 정식 정전을 건립했으니 바로 중화전이다. 중화문도 이 때 정전의 정문으로 지었다. 1901년(광무 5년) 8월 20일에 정초 했고, 같은 달 30일에 기둥을 세웠으며, 9월 24일에 상량했고, 10월 29일에 현판을 걸었다. 이를 보아 중화전 본전보다는 빨리 공사가 끝난 듯하다. 중화문 건립으로 경운궁의 구조 또한 크게 달라졌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 궁장 가운데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중화문 공사 및 궁역 확장을 하면서 철거했고 대신 동쪽 문인 대안문을 새 정문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옛 사진을 보면 인화문 터와 중화문의 위치는 몇 걸음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또한 원래 중문이던 돈례문 역시 없앴고 새로운 중문 조원문을 지었다. 금천과 금천교 역시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에 있었으나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 금천을 팠고 원래 금천은 묻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년) 대화재로 불탄 이후 1906년(광무 10년) 중건했다. 이 때 모습 조금 달라졌다. 중화문을 기존의 자리보다 약간 남쪽으로 더 옮겨지어 결과적으로 중화전 뜰은 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후,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궁궐 공원화했다. 이 때 석조전 앞 뜰에 정원을 만들었는데, 정원을 침범한다는 이유로 중화문의 행각을 헐었다. 이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중화문의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인 1층짜리 문이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7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제일 아랫 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과 계단을 조성했고, 가운데 황제가 다니는 어칸(御間) 앞에는 서수를 두 마리 놓고 쌍용을 새긴 답도를 설치하여 황제국의 궁궐임을 나타내었다.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았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 양식이다. 어칸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4개의 공포를 두었다.(이렇게 기둥 사이에 놓는 공포를 주간포라 한다.) 협칸에는 각각 3개의 주간포를 얹었으며, 공포 사이사이는 벽으로 마감한 뒤 문양을 장식하여 한층 멋을 돋보였다. 기둥이 다른 궁궐의 문들에 비해 훤칠하게 높다. 키다리 아저씨 그렇잖아도 높은 기둥들 중에서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도 훨씬 높게 세웠다.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고,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로 단청으로 했으며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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