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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창경궁 내조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2]

by 또바기벗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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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침전이다. 사실 창경궁은 대비 등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어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통명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주로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한 듯하다.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서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전(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그리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통달(通)하여 밝다(明)’는 뜻으로, '크게 밝은(明) 전각에 앉아서 백성들의 삶을 통달(通)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양화당 역시 창경궁의 침소이다. 통명전의 동쪽에 있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은 궁이다. 그래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때문에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어느 전각을 어느 지위 사람이 썼는지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양화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는 왕실 내 최고위급 인물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 하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양화(養和)' 뜻은 '조화로움(和)을 기른다(養)'이다.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영춘헌(迎春軒)은 창경궁의 북쪽, 양화당(養和堂)의 동쪽에 있는 침전 건물이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정조대 이후 주로 왕의 서재로 사용되었으며, 양화당이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사용될 때는 그 부속채였다. 현존하는 영춘헌은 1834년(헌종 즉위)에 중건된 건물로 수리·보수되면서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영춘(迎春)’은 ‘봄(春)을 맞는다(迎)’는 뜻이다.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에 있었던 후궁들의 처소로 숙종 말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집복헌에서는 1735년(영조 11)에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태어나고, 1790년(정조 14)에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는 석복헌의 외헌(外軒)에서 원자 시절에 강학(講學)하였으며, 세자 시절에 관례(冠禮)와 책례(冊禮)를 치렀다. 1834년(순조 34)에 화재로 소실된 영춘헌(迎春軒)을 다시 지으면서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건축 형태가 완성되었다.

창경궁 내조 건축물 통명전의 역사와 구조

통명전의 역사 :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했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1633년(인조 11년)에 복구했는데 이때 인경궁의 청와전(靑瓦殿)을 옮겨지었다. 1790년(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통명전의 구조 :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에 1층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평면은 ‘一’자 형태로 되어있다. 연회같은 행사를 할 수 있게 월대를 굉장히 큰 규모로 만들었으며 월대 위엔 박석을 깔고, 정면에는 5단의 계단을 3개, 그리고 동, 서에 각각 3단의 계단을 2개씩 배치했다. 이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은 다음 그 위에 강회다짐을 하고 이어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의 뼈대를 만들었다. 쇠서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으며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했으며 잡상의 수는 3개이다. 대한제국 시기 촬영한 사진을 보면 측면에 가퇴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창호는 다른 궁궐의 침전과는 다르게 ‘정(井)’자형으로 되어 있다. 다만 온돌방 쪽 툇간으로 드는 두 짝씩의 창호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띠살을 쓰고 있다.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했다. 대청의 천장은 전체적으로 우물 반자로 막은 뒤 청판에 모란을 그려 넣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1칸, 측면 2칸을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 뒷면의 협칸은 툇마루로, 측면의 협칸은 온돌 쪽방으로 구성했고 방의 천장은 종이천장으로. 툇마루의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감했다. 일제강점기에 통명전을 창경원 박물관 진열실로 쓰면서 온돌을 뜯어내고 방, 마루 구분 없이 공간을 다 터서 크게 훼손되었으나 1980년대 이후 실내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통명전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한경지략》에 “통명전에는 원래 푸른 기와를 덮었는데, 정조 때 화재로 탔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때 건물이었다고 한다.”라고 되어있다. 물론 고려 때 지은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청기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청기와를 많이 쓴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 지은 것이며 무엇보다 옮긴 전각의 이름이 청와전(靑瓦殿), 즉 뜻 자체가 ‘청기와 집’이기 때문이다. 1633년(인조 11년) 재건 당시 통명전뿐 아니라 주변 건물도 인경궁에서 헐어다 지은 듯하다. 《창경궁수리소의궤》에 의하면 통명전의 서책방은 인경궁 함인당(涵仁堂)의 대청 앞 툇간과 헌잠당(獻箴堂)의 온돌을 옮겨서 조성했으며 동행각 역시 인경궁 함인당의 서온돌과 진연청(盡筵廳)의 북월랑을 옮겨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통명전의 지당 : 이 건물 서쪽에는 화강석으로 아름답게 조성한 지당(池塘)이 있다. 남북 길이 12.8m, 동서 길이 5.2m의 장방형 연못인데, 연못의 4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둘레에 돌난간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돌렸다. 지당 위에는 길이 5.94m, 폭 2.56m의 간결한 돌다리를 동서로 설치했다. 이 지당의 물은 북쪽 4.6m 떨어진 샘에서 넘쳐나는 물을, 직선으로 설치한 석구(石溝)를 통해 폭포로 떨어지도록 고안했다. 한국의 지당 가운데 가장 기발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는다.

창경궁 내조 건축물 양화당의 역사와 구조

양화당의 역사 : 양화당은 1483년(성종 14)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중에도 소실되지 않았다. 1790년(정조 14) 통명전에 큰 불이 났을 때에도 양화당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아 화재를 면하였다. 1672년(현종 13)에는 양화당이 오래되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 개수하였다. 1730년(영조 6)에 창경궁 경극당(敬極堂)과 집복헌(集福軒) 등의 온돌 아래에서 흉물이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여 양화당도 철거 후 개수하였다. 이때 건물의 몸체는 3칸이고 사면에 툇마루를 갖춘 건물이었다고 한다.

1830년(순조 30) 3월 창경궁 내전에 대규모 화재가 일어 경춘전과 환경전·양화당·함인정(涵仁亭)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1833년(순조 33)에 새롭게 영건 하였다. 순조 연간에 새로 건립하면서 정면 6칸으로 변화되었으며,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온돌의 규모가 같아 좌우 대칭의 평면을 갖게 되었다. 1833년 이전의 양화당 모습은 「동궐도」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새롭게 조성된 모습은 『창경궁영건도감의궤』의 도설을 통해 비교해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양화당은 살아남았다. 외부는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합각[3]에 서양식 창문이 생겼고, 측면의 바깥 면은 중방 위의 벽 빼고는 전부 창문만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내부는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뀌어 많이 훼손당했다. 온돌을 뜯어내고, 전부 마루가 깔았으며, 모든 칸이 한 공간으로 터버렸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내부를 복원했고 이후 오늘에 이른다.

양화당의 구조 : 양화당의 모습은 크게 1484년에서 1730년, 1730년에서 1830년, 그리고 1833년부터 현재까지,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일 앞 시기(1484 ~ 1730)의 모습은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 자세하게는 확인이 불가능하나, 1730년(영조 6년) 개수 당시의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몸체는 3칸이고 4면에 툇마루를 두른 모습이었다 한다. 두 번째 시기(1730 ~ 1830)의 모습은 《동궐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궐도》를 보면, 1층[4]으로 평면은 ‘一’자 형태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 규모이며 제일 동쪽 칸은 누마루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두와 취두를 올렸고, 남면과 동면의 가장자리엔 쪽마루를 덧대었으며 가장자리엔 난간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면의 가운데 칸엔 나무 사다리를 설치하여 쪽마루로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정면 왼쪽에서 3, 4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대청 칸 앞의 툇마루를 바깥으로 통하게 하여 현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정면에 하나 있다. 동측면의 기단은 계단처럼 쌓아 그 자체로 계단 역할을 하게 했으며 그 위에는 나무판 문을 달았다. 특이한 것은 정면 기단과 이어지게 담장을 쌓고 그 담장을 기단 측면의 나무판 문과 연결시켰다. 1883년 이후서 현재의 양화당 모습은 《동궐도》에서 묘사한 것과는 꽤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 3벌로 깔고 정면에는 4단의 계단을 2개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예전과 같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소로를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총 24칸으로, 앞면과 뒷면의 대청과 이어지는 가장자리 칸은 툇간으로 구성했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툇간과 대청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대청 2칸의 정면과 뒷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대청을 제외한 앞면 칸 주위에는 쪽마루를 두고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이다. 서쪽에 정면 15개, 측면 3개, 동쪽에 정면 14개, 측면 3개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창문과 문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이다. 양 측면의 경우, 온돌방이 있는 2칸은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창을 놓은 뒤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했으며 북쪽(건물 뒤쪽) 툇간의 외면은 전부 벽으로 두었다. 남쪽(건물 앞쪽) 툇간의 외면은 벽 없이 창만 달려있다. 아궁이가 건물 측면이 아닌 정면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다른 궁궐의 전각처럼 행각, 돌담, 문 등으로 독립된 영역을 구성했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에 이른다.

창경궁 내조 건축물 영춘헌의 역사와 구조

영춘헌의 역사 : 영춘헌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집복헌(集福軒)과 함께 숙종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춘헌을 가장 많이 이용한 인물은 정조이다. 정조는 동궁 시절에 창경궁의 구 홍문관(弘文館) 자리인 감인소(監印所)에서 즐겨 읽던 주자(朱子)의 글을 편집하여 『주서백선(朱書百選)』을 인쇄하였다. 정조는 영춘헌이 감인소에서 가까워 편리하다는 이유로 주로 이곳에 머물렀으며, 이때부터 영춘헌이 서재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조가 자주 머무는 공간인데도 건물이 격식을 갖추지 못하자 1796년(정조 20)에 정리당상(整理堂上)인 이시수(李時秀)가 개수할 것을 청했다. 이에 대하여 정조는 영춘헌이 옛 건물에 처마만 달아 쓰기 때문에 서까래의 경사가 낮아 빗물이 새는 것이니 고치지 말라며 도배도 간단히 하도록 했다. 영춘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정조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에 당시 왕대비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영춘헌을 빈전(殯殿)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원상(院相)이 비좁다고 하자 환경전(歡慶殿)으로 옮겨 빈전을 꾸미도록 하였다. 영춘헌은 1830년(순조 30) 8월 1일 오시(午時)에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전소되었다가 1834년에 창경궁의 내전을 복구하면서 중건되었다. 이때 현판은 봉조하(奉朝賀)남공철(南公轍)이 썼다. 재건된 영춘헌은 헌종의 사랑을 받았다. 정조를 닮고자 했던 헌종은 중건된 영춘헌을 정조처럼 서재로 활용했다. 소대(召對)와 야대(夜對)하며 경서 강독을 하는 건물로 활용했고,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영춘헌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고종도 마찬가지로 영춘헌에서 대신(大臣) 및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과 더불어 경서를 강독하였다.

영춘헌의 구조 : 〈동궐도〉를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의 아담한 규모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정면 가장자리에는 쪽마루를 덧대었다. 계단은 정면 앞에 총 2벌이 놓여있다. 외부는, 정면과 남쪽 측면(정면 쪽)의 경우 전부 문으로 두었으며, 북쪽 측면은 벽으로 마감하고 가운데에 창문을 두었다. 건물의 서쪽에는 남북으로 긴 나무 판장과 솟을대문 2칸을 두었고, 나머지 남쪽과 동쪽에도 담과 문, 행각을 두어 다른 전각들과 영역을 구분했다. 1833년 이후에서 현재의 모습은  화재 이후 예전 모습과 다르게 지었다. 규모도 정면 7칸, 측면 2칸의 총 14칸으로 늘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13칸을 덧대었으며 또한 과거에는 별개 건물이던 집복헌과 합쳐졌다. 원래 집복헌이 더 컸는데 이때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기단은 장대석 3벌로 깔고 정면에는 4단 짜리 계단 2개를 두었다. 그리고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고 용두를 올렸다. 단청은 긋기단청으로 칠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바깥 면을 보면, 본채 대청 2칸과 대청 동쪽의 온돌방 1칸의 경우, 툇마루를 야외와 통하게 했다. 그리고 대청 칸에 분합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온돌방 쪽은 전부 문선을 두고 가운데 창문을 낸 뒤 나머지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며 마루방의 바깥 면은 창문이다. 동북쪽에 있는 부엌 칸은 나무 판문을 달고 그 위에 벽을 둔 형태이다. 창호는 띠살이다. 아궁이가 건물 측면이 아닌 정면에 있다.

창경궁 내조 건축물 집복헌의 역사와 구조

집복헌의 역사 : 집복헌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695년(숙종 21)에 제작된 『어제궁궐지(御製宮闕志)』의 본편에는 집복헌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신증편에 ‘집복헌은 통명전 동쪽에 있다[集福軒在通明殿之東].’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숙종 말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집복헌에 관한 기록은 『영조실록』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 대내(大內)의 여러 침실에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이 나와서 수리해야 한다는 내용에 집복헌이 등장한다. 이로써 집복헌이 침실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조 연간에 집복헌을 침실로 사용한 사람은 후궁 영빈이씨(暎嬪李氏)였다. 그녀는 집복헌에서 1735년(영조 11)에 장헌세자(莊獻世子)를 낳았다. 정조 연간에는 수빈박씨(綏嬪朴氏)가 집복헌을 거처로 사용하면서 1790년(정조 14)에 순조를 낳았다. 집복헌이 영빈이씨와 수빈박씨의 거처로 활용되면서 장헌세자와 순조도 원자 시절을 집복헌에서 보냈다. 정조는 창경궁에 있는 영춘헌을 서재로 사용하면서 원자의 강학(講學)을 주도했으며, 왕세자의 관례와 책례도 집복헌의 외헌에서 치르도록 하였다. 1800년(정조 24)에 왕세자의 책봉례가 있던 해에 집복헌에서는 세자빈의 첫 번째 간택이 이루어졌다. 창경궁의 내전 일대는 1830년(순조 30)에 환경전(歡慶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다시 복구되었는데, 이때 집복헌과 영춘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헌종 연간에 제작된 『궁궐지(宮闕志)』에는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행각이다.”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집복헌과 영춘헌이 연결되어 개축되면서 집복헌의 기능과 위상이 변화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집복헌에 관한 기록은 이후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1894년(고종 31) 5월에 왕이 잠시 머무르면서 정무를 본 기록이 있을 뿐이다. 집복헌은 창경궁의 통명전과 영춘헌의 가운데에 위치했는데, 1834년에 수개된 것이 현재까지 수리, 보수되면서 이어져 왔다.

집복헌의 구조 : 1830년(순조 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은 〈동궐도〉에 나와 있다.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되면서 이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별개 건물이던 영춘헌과 합쳐져 두 전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집복헌이 더 컸는데 이때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기단은 장대석 1벌로 깔고 정면에는 계단 없이 댓돌만 두었다. 그리고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 없이 창방과 서까래가 바로 만나는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단청은 긋기단청으로 칠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벽체의 경우, 온돌방 쪽은 전부 문선을 두고 가운데 창문을 낸 뒤 나머지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대청의 바깥 면은 창문으로 되어있다. 다만, 남쪽의 대청 2칸은 앞, 뒤로 문이 설치되어있어 출입할 수 있게 두었다. 가운데 마당에서 볼 때 북쪽에 있는 툇마루의 바깥 면은 창, 문, 벽 없이 바깥과 뚫려있어 현관 기능을 할 수 있게 했다. 창호는 전부 띠살이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설치했다. 분합문은 위, 아래에 한지가 발라져있고 중간에 화려한 '아(亞)'자 살 창이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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