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내조 영역 내 건축물로는 경춘전, 환경전,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집복헌이 있다. 경춘전은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경춘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 등을 볼 때, 대체적으로는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된 듯하다. 이름은 성종 시기 창건할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을, '춘(春)'은 장수함을 뜻하니 옛날과 지금에 걸쳐 축복하는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환경전 또한 창경궁의 침전이다. 경춘전의 동쪽, 함인정의 북쪽에 있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은,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며 환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을 볼 때, 주로 왕과 왕세자 등 주로 왕실 내 최고위급 남성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하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환경(歡慶)’은 《시경》 - 〈소아 · 초자〉 편에서 유래한 말로, ‘기뻐하고(歡) 경하(慶)한다’는 뜻이다.
창경궁 내조 건축물 경춘전의 역사와 구조
경춘전의 역사 : 경춘전은 1483년(성종 14)~1484년(성종 15)에 조성된 창경궁 영역 내에 건립된 침전 건물이다. 제일 먼저 경춘전을 침전으로 사용한 사람은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알려진 추존왕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소혜왕후는 죽음도 이곳에서 맞이했다. 경춘전은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에 한성부 백성들이 불을 놓으면서 1차로 소실되었다. 복구된 것은 1616년에 광해군이 경복궁을 제외한 두 궁궐을 수리하면서이다. 이때의 경춘전은 명광전(明光殿)과 더불어 다른 침전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다시 지어진 경춘전은 숙종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처소로 사용되면서 숙종의 침전이 되었다.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인현왕후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영조 재위 기간 중에 이곳을 주로 사용한 사람은 혜경궁 홍씨로 그녀는 이곳에서 의소세손과 정조를 낳았다. 정조는 즉위 후 혜경궁 홍씨를 위해 별도로 자경전(慈慶殿)을 지어 주었지만, 혜경궁은 효의왕후(孝懿王后)에게 자경전을 내어주고 경춘전에서 주로 생활하다가 81세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혜경궁이 떠난 경춘전을 주로 사용한 것은 순조와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이다. 효명세자빈인 신정왕후는 1827년(순조 27)에 이곳에서 헌종을 낳았다. 1830년(순조 30)에 경춘전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던 환경전(歡慶殿)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함인정(涵仁亭), 공묵합(恭默閤), 숭문당(崇文堂), 영춘헌(迎春軒), 오행각(五行閣), 빈양문(賓陽門)을 태우면서 경춘전도 함께 소실되었다. 재건된 것은 1834년(순조 34) 3월로 현판은 광주유수(廣州留守)김이재(金履載)가 썼다. 현재 창경궁의 명정전 뒤편에 있는 경춘전은 이때 재건된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유물 전시실로 쓰여 내부와 외형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2000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경춘전의 구조 : 1층으로 평면은 ‘一’자 형태로 되어있다. 기단은 장대석 2벌로 깔고 정면에는 5단의 계단을 1개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쇠서 2개를 둔 이익공 양식이다.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를 두었다. 잡상은 놓지 않았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4면의 가장자리 칸은 툇간으로 구성하였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대청 양 옆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분합문은 위, 아래 한지가 발라져 있고 중간에 정(井) 자 살 창문이 있는 모습이다. 전술했듯, 일제강점기에 전시실로 쓰면서 외부와 내부가 변했다. 전부 마루가 깔렸고 모든 칸이 한 공간으로 트였다. 현재는 복원된 상태이다. 대청 3칸의 정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단, 칸마다 가장자리에 난간을 두었고 가운데 칸의 난간 중간에 사람 한 명 정도가 지나다닐 공간을 두어 실질적으로는 가운데 칸으로만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뒷면엔 문이 없어 출입이 불가능하다.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창문과 문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이다. 양 측면의 경우, 온돌방이 있는 2칸은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창을 놓은 뒤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했으며 서쪽(건물 뒤쪽) 툇간의 외면에는 창을 두고 중방 위를 벽으로 두었다. 동쪽 툇간의 외면은 벽 없이 교창과 문이 달려있는데, 원래 경춘전 측면에 가퇴가 있었기 때문이다. 18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은 〈동궐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모습과 크게 다른 것은 없으나 몇 가지 차이를 보인다. 측면에 3칸짜리 가퇴를 놓고 가퇴와 건물 주위에 쪽마루를 두었으며 쪽마루를 받치기 위해 하단부에 돌기둥을 두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다. 계단도 돌이 아닌 나무 사다리로 되어있으며 정면뿐 아닌 측면에도 놓였다. 《동궐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주위에 나무 판장과 행각, 돌담 등으로 독립된 영역을 구성하였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에 이른다. 경춘전 현판이 건물 외부 말고도 대청 가운데에 하나 더 걸려있다. 바깥 현판과 마찬가지로 순조의 친필이다. 창경궁 내전 건물 중 이런 경우가 더러 있는데 대표적으로 통명전의 현판 역시 건물 안팎으로 2개가 걸려 있다. 대청에 걸린 경춘전 현판 옆으로 왼쪽엔 정조가, 오른쪽엔 순조가 지은 《경춘전기(景春殿記)》가 걸려있다. 이 밖에도 대청 왼편에 윤집궐중(允執厥中)이란 편액도 걸려있다.
창경궁 내조 건축물 환경전의 역사와 구조
환경전의 역사 : 1483년에 조성된 환경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인조 연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어 1634년(인조 12)에 인경궁(仁慶宮)의 문명전(文明殿)을 옮겨 지었다. 이때 규모는 정면 5칸에 사면 퇴를 갖춘 총 28칸 규모였다. 동월랑에는 전퇴를 갖추고 11칸이 조성되었으며 남월랑도 전퇴를 갖추고 13칸으로 조성되었다. 서월랑은 퇴없이 12칸으로 조성되었다. 숙종 연간에는 혼전과 빈전으로 사용되었다. 통명전에 빈전이 설행 될 때 환경전이 왕의 거려(居廬)로 사용되면서 점차 상장례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상장례 공간으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환경전 남월랑에 공묵합(恭默閤)이 형성된 것이다. 1757년(영조 33) 3월에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승하하자 빈전을 통명전에 설치하고 영조는 환경전 남월랑을 거려청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공묵합이라 명하고 현판을 내걸었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 빈전을 통명전에 설치하면서 환경전을 거려로 삼았고, 숙종 연간 장렬왕후와 인현왕후의 빈전이 환경전에 설치되면서 그 남행각을 거려로 삼았기 때문에 전례를 따라 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거려청의 이름을 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명에 따라 영춘헌에 빈전을 설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좁아 환경전으로 옮겨 설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1805년(순조 5) 정순왕후의 빈전,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빈전,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전이 차례로 환경전에 설치되었다. 1830년 환경전에 효명세자의 재실(梓室)을 모셔 두고 빈전 의례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화재가 발생하였다. 재실이란 왕세자의 시신을 담은 관이다. 불이 번져 환경전 남행각의 공묵합과 동쪽의 경춘전, 남쪽의 함인정(涵仁亭)과 숭문당(崇文堂)·영춘헌(迎春軒)·빈양문(賓陽門)까지 모두 탔다. 재실은 불길 속에서 겨우 꺼내어 통명전의 동쪽에 위치한 환취정(環翠亭)에 임시로 안치하였다가 도총부(都摠府) 건물로 옮겼다. 이날의 화재로 환경전은 새로 조성되는데, 이때 환경전 남쪽의 행각에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남행각의 정문으로 이명문(离明門)이 있었으며 그 남쪽에 체인문(體仁門)이 있었다. 그러나 1833년(순조 33) 재건 이후 환경전의 남행각 문은 개광문(開廣門)이 되었으며 그 남쪽에는 홍인문(弘仁門)이 설치되었다. 단순히 문의 이름이 변화한 것만은 아니며 물리적인 건물의 변화가 있었다. 특히 남행각에 공묵합이라는 재실이 그 형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재가 일어난 당시 환경전은 빈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재건될 때에도 빈전에 적합한 공간을 갖추었다. 그 예로 환경전의 앞마당에 4칸의 복도각이 조성되었다. 환경전의 본 건물 규모는 변화 없이 28칸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앞마당에 복도각이 조성되고 남행각의 공묵합은 규모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환경전은 계속 빈전 의례를 설행하여 1834년(헌종 즉위) 순조의 빈전, 1843년(헌종 9) 효현왕후(孝顯王后)의 빈전, 1849년(철종 즉위) 헌종의 빈전, 1860년(철종 11)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빈전, 1863년(고종 즉위) 철종의 빈전, 1878년 철인왕후의 빈전 등이 설치되었다.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을 재건하고 북서쪽 영역에 태원전(泰元殿)과 문경전(文慶殿) 등의 상장례 공간을 조성하여 신정왕후(神貞王后)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빈전과 혼전을 설치하면서 환경전의 빈전 기능은 끝이 났다. 고종이 경복궁에 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태원전을 조성할 때 태원전 남행각에 재실을 갖추고 그 이름을 공묵재(恭默齋)라 한 것은 환경전의 전례를 답습한 것이라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환경전은 살아남았다. 다만, 일제가 환경전을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꾸면서 외부와 내부를 많이 훼손했다.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환경전의 구조 : <동궐도>를 보면, 1층[5]으로 평면은 ‘一’ 자 형태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정면에 두 개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두와 취두를 올렸고, 건물의 가장자리 1열의 하단부에는 돌기둥을 두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정면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대청 칸 앞의 툇마루를 바깥으로 통하게 하여 현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건물 바깥 면의 가장자리엔 쪽마루를 덧대었으며 쪽마루 가장자리와 대청의 가운데 칸엔 난간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면의 가운데 칸엔 나무 사다리를 설치하여 쪽마루로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빈전으로 쓰던 시기에 재건했기 때문에, 1833년(순조 33년)에 다시 지을 때 환경전 정면에 복도각 4칸을 설치했다. 복도각은 혼령이 다니는 길을 뜻한다. 현재는 환경전 건물만 외따로 있지만, 원래는 다른 궁궐의 전각처럼 행각, 돌담, 문 등으로 영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1908년(융희 2년)에 제작된 〈동궐도형〉을 보면 서, 남쪽에 행랑이 있으며 동쪽에는 돌담을 설치했다. 북쪽에는 창고를 두었는데 창고 사이에 돌담과 우물을 두었다. 문은 총 7개가 있는데, 4개는 행랑에, 3개는 담에 달렸다. 이름이 전해지는 문은 2개인데 남행랑에 있는 환경전의 정문 개광문(開廣門)과 서행각에 있는 집의문(集義門)이다. 또한 영조가 이름 붙였던 공묵합의 규모가 넓어졌다. 그리고 문을 제외한 행랑의 칸들의 내부를 주방(廚), 대청(廳), 방(房)으로 꾸몄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에 이른다. 건물 본채는 〈동궐도〉에서 묘사한 것과는 꽤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 2벌로 깔고 정면에는 6단짜리 계단 2개를 붙여 가운데 칸 앞에만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예전과 같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칸 수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화재 전과 같다. 건물의 가장자리 칸은 툇간으로 구성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대청 좌, 우에 각각 온돌방 2칸을 놓았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대청 2칸의 정면과 뒷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대청의 천장은 소란반자, 온돌방의 천장은 종이반자로 마감했고, 툇간 부분만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했다. 바깥 면의 외형은, 벽 없이 전부 창문과 문으로만 되어있다.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측면 가운데 2칸과 대청 앞면과 뒷면의 출입문 및 현관에서 툇간으로 가는 문만 띠살이고 나머지는 전부 정(井)자 살이다. 아궁이가 건물 측면이 아닌 정면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위에 언급했듯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꽤 변했다. 외부의 경우, 대청 밖에 툇마루가 드러나 있는 3개의 칸 중, 가운데 칸을 제외하고 바깥에 창문을 설치했다. 내부는 전부 마루가 깔렸고 모든 칸이 한 공간으로 트였다. 현재 마루가 깔려있는 3개의 칸은 원래 모습대로 복원 됐지만, 내부가 통으로 트여있는 것은 아직 복원되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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