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덕수궁의 역사 중 조선 초기 ~ 법궁 시기까지 알아봤다면 이번 글에서는 화재 및 덕수궁 시기, 일제강점기 시기, 광복 그 이후의 시기에 대해 알아보겠다.
덕수궁 역사 중 화재 및 덕수궁 시기
국가의 재정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증축을 거듭한 덕수궁이었지만, 1904년 4월 14일 밤 10시경에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바람이 거센 까닭에 화재는 삽시간에 주변의 건물로 번지며 궁의 중심부를 집어삼켰다. 이때 정전인 중화전뿐 아니라 가장 오래된 건물인 즉조당과 석어당, 신주(神主)를 모셨던 경효전과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이 모두 소실되었다. 특히 고종은 즉조당을 두고 선조의 시어소 시절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 서까래 하나 고치지 않았는데 소실되었다며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고종은 당시 관명전에 머무른 까닭에 화마를 입지 않았고, 화재가 일어난 사실을 인지한 뒤 수옥헌(현재의 중명전)으로 피난하였다. 고종은 이튿날인 15일 자책하는 내용의 조칙을 반포하며 5일간 감선(減膳)을 행하였다. 16일에는 종묘, 효혜전, 환구단에서 고유제를 올렸다. 고종은 즉시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다. 고종의 복구명령에 반대하는 상소도 많이 올라왔다. 반대 측은 경운궁이 을미사변 이후 임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건을 위해 많은 재정을 소비하였는데, 구태여 중건하기보다는 창덕궁이나 경복궁으로 환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 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경운궁은 중건되었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이는 비서승(秘書丞)이며 풍수(風水)의 대가인 유시만(柳時滿)이 “국조연창(國祚延昌)하려면 ‘대안’을 ‘대한’으로 고쳐야 좋겠다.”라고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문은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이 있고 장엄한 돌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1907년 7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인 순종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개원과 더불어 고종이 머물던 태황제궁(太皇帝宮)인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德壽)라 함으로써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순종은 그해 9월 17일 즉조당에 이어(移御)하였다가 11월 13일 창덕궁으로 이어 하였다. 태황제는 양위 후 일시 수옥헌으로 옮겼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다시 함녕전에 환어하여 1919년 1월 서거할 때까지 이곳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덕수궁의 일제강점기 시기
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이미 국권은 일본 제국에 넘어긴 후였다. 1912년에 종로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직선도로인 태평로(현 세종대로)를 만드는데, 도로의 영역과 덕수궁의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총독부는 동쪽 궁벽을 허물고, 그 근처에 있던 궐내각사 건물도 허물었다. 허물기 이전에는 현 서울특별시청 건물까지 덕수궁 궁장이 닿아있었다. 이 때 대한문도 당시의 위치에서 뒤로 옮겨졌다. 1919년에는 덕수궁에서 머물던 태황제 고종의 사망으로, 이후 덕수궁은 궁궐의 어떠한 기능도 수행하지 못했다. 고종 승하 후 1920년에는 미국공사관과 덕수궁 사이에 덕수궁길을 낸다. 1912년에 양이재 등 수학원 영역을 임대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해당 영역을 매입한다. 더 나아가 이왕직 및 총독부는 필지를 분할하여 1922년에는 의효전 자리에 경성제일고등여학교를, 1923년에는 그 맞은편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를 세운다. 미국공사관도 토지를 매입했다. 1926년에는 창덕궁에서 순종이 사망한다. 그 후 구세군에 필지를 내어주고, 1931년에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어 대중에 공개하자는 계획이 추진된다. 탑골공원이 협소하고 남산공원, 창경원보다 접근성이 좋다는 명목에서 공원화를 진행한 것이다. 덕수궁 중화전을 둘러싼 행랑을 포함해 많은 부분이 철거된다. 돈덕전이 있던 곳에는 아동을 위한 아동공원이 만들어졌고, 광명문이 있던 곳에는 커다란 연못이 조성되었다. 1933년 9월에는 덕수궁을 일반에 공개하고, 창경궁의 이왕가박물관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고자 하는 계획을 발표한다. 석조전의 서측에 30만원의 금액을 들여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가미술관 건물을 1937년 8월에 기공하고 1938년 6월 5일에 개관하였다. 석조전은 이왕가미술관 구관(舊館)으로, 신축한 건물은 이왕가미술관 신관(新館)으로 불렀다. 조선의 고미술품은 이왕가미술관에서, 현대미술품은 석조전에서 전시하였다.
덕수궁의 광복 그 이후 시기
6.25전쟁 이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6.25 전쟁의에서 인민군이 덕수궁으로 숨어 들어간 적도 있었다. 미군이 포격을 개시하면 덕수궁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임스 딜 중위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파괴된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예를 들며 포격을 반대했다. 이후 인민군이 을지로 방면으로 도망치자 포격을 개시하여 덕수궁은 훼손되지 않았다. 제임스 딜 중위는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감사패를 수여받았다. 그렇게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이후로도 덕수궁은 부분적으로 훼손당했다. 1960년대 초반 돌담이 헐리고 창살담으로 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마치 낙동강 오리알처럼 고립되어 버렸고 결국 이 문을 서쪽으로 옮겨야 했다. 덕수궁은 그동안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책에서 사괴석(四塊石)담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68년 2월에는 태평로를 확장할 때 문화재관리위원회는 대한문을 후퇴시키기로 결정하였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궁장들은 옮겨졌기 때문에, 대한문은 태평로 중앙에 섬처럼 남게 되었다. 이후 1970년 11월에 33미터 뒤로 이건하여 현재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세종대왕 동상을 새로 설치하기도 했다. 현재 세종대왕 동상은 청량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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