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크게 네 가지 구역으로 나뉜다. 궁문, 내조, 외조, 기타 건축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오늘은 궁문과 기타 건축에 속한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알아보겠다. 창경궁의 궁문에 속한 건축물에는 홍화문, 월근문, 선인문, 집춘문이 있고,
기타 건축에 속한 건축물에는 빈양문, 함인정, 관덕정, 대온실(식물원), 춘당지가 있다.
창경궁 궁문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홍화문 :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을 보이며, 안정되고 차분한 인상을 주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대문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화(弘化)는 조화를 넓힌다는 뜻이다. 창경궁처럼 궁의 정문 역할을 했던 건축물은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덕수궁의 대한문이 있다. 맞은편에 경모궁이 있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이다. 홍화문이 역사는 다음과 같다. 1483년(성종 14년)에 창덕 궁 옆 옛 수강궁터에 창경궁을 지을 때 정문으로 창건되었다.[1]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던 서거정이 지었는데, 《서경》 〈주서(周書)〉의 "貳公弘化, 寅亮天地, 弼予一人", 즉 "공의 다음이 되어 조화를 넓혀[弘化] 천지를 공경하여 밝혀서 나 한 사람을 보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약 100여 년 뒤인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철거되며 창경원으로 개조될 때 남아있어 창경원의 정문 노릇을 했다. 창경원이 이후 창경궁으로 복원된 뒤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화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명정전이 동측을 바라보고 지어진 까닭에 그 정문인 홍화문도 동향으로 건설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2층)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내7포, 외 5포이며, 상층과 하층의 공포는 모두 내3출목, 외2출목이다. 기둥 길이는 14척이다. 보 칸은 10척씩, 도리 칸은 3칸에 각 14척씩이다. 문 안에 금천교가 있고, 남쪽 모서리에 영군직소 20칸이 있었다. 남북으로 행각이 있는데, 남행각은 보 칸 2칸, 도리 칸 19칸 합이 38칸이다.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위층 누간에 오르면 사면벽에 낸 판문을 통해 사방을 관망할 수 있다. 명정전의 공포형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명정전, 명정문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운다. 창경궁·창덕궁 등의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월근문 : 홍화문 북쪽에 있는 문으로 특이하게 대문과 작은 문이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다. 정조가 친부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년)에 건립했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 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했기 때문에 월근문이라 이름했다 한다. 월근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층 목조 건물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총 4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왼쪽 칸 지붕이 낮고 오른쪽 칸 지붕이[A] 높은 솟을지붕 형태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오른쪽 칸에는 초익공 형식의 공포를 두었다. 하지만 왼쪽 칸은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 양식이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며 오른쪽 칸에 걸려 있다. 문짝과 벽체는 전부 붉은 칠을 한 나무판이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고, 문틀 위에는 홍살을 두었다. 왼쪽 칸 홍살은 문틀 바로 위에 있으나, 오른쪽 칸 홍살은 문틀 위에 풍혈을 뚫은 9개의 궁판을 놓고 그 위에 만들어 놓았다. 문지방이 없다. 단, 각 칸의 바닥 가운데에 둥근 돌을 박아놓아 문을 고정시켰다.
선인문 : 선인문(宣仁門)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남쪽에 설치한 문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홍화문 바른편에 있는 문을 선인문이라 하고 조정 신하들은 대개 이 문으로 출입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이 문의 옛 이름은 서린문(瑞獜門)인데, 뒤에 선인문으로 고쳤다.”라고 했다. 선인문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483년(성종 14년) 창경궁 창건 때 지었다고 한다. 다만, 1475년(성종 6년)에 창덕궁 밖 동쪽 담장 문을 선인문으로 이름지었다고 하는데, 이 문이 창경궁의 선인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 재건했다. 1857년(철종 8년)에 화재를 입었고 1877년(고종 1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선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층 목조 건물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총 4칸이다. 《동궐도》와 현재의 모습이 다르다. 지붕은 현재는 평지붕이지만, 《동궐도》에는 창경궁 동북쪽 출입문인 월근문처럼 왼쪽 칸 지붕이 낮고 오른쪽 칸 지붕이 높은 솟을지붕 형태였다. 그리고 문 북쪽으로 현재는 돌담이 붙어있지만, 《동궐도》에서는 행각이 붙어있는 모습이다. 아마 철종 때 불탄 것을 고종 때 재건하면서 바꾼 듯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지붕 양 끄트머리에는 용두를 올렸다.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 양식이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며 오른쪽 칸에 걸려 있다. 문짝과 벽체는 전부 붉은 칠을 한 나무판이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고, 문틀 위에는 궁판을 놓고 그 위에 홍살을 올렸다. 왼쪽 칸 궁판은 7개로 세로 길이가 길며, 오른쪽 칸 궁판은 8개로 세로 길이가 짧다. 양쪽 문짝의 높이가 다른데, 오른쪽 칸의 높이가 더 높다.
집춘문 : 집춘문(集春門)은 창경궁의 동북 궁장에 있는 문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연결되었다. 성종대에 창경궁 건립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집춘문은 성균관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역대 왕들이 불시에 성균관에 행차할 때 이용하였다. 특히 중종은 불시에 집춘문으로 유생들을 불러들여 경서(經書)를 강(講)하게 하고 합격한 자에게는 점수를 주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수리된 집춘문은 여전히 성균관과 연결되었으며, 이전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숙종은 대보단(大報壇)을 조성하면서 후원(後苑)의 서쪽 담과 동쪽 담 사이를 연결시켜 쌓고, 후원의 담에 문을 만들어서 친제(親祭) 때 거둥하는 길로 만들었다. 이때 문의 제도는 집춘문을 따랐다. 집춘문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지은 때는 정확히 모르나, 1483년(성종 14년) 창경궁 창건 때 만든 듯 하다. 임진왜란 때 불탔는지는 모른다. 1616년(광해군 8년) 5월 23일 자 《광해군일기》를 보면 집춘문 밖을 수리하란 기사가 있는데, 이 집춘문이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지, 아니면 불타지 않은 건지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집춘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층 목조 건물이다. 칸 수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총 1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 양식이다. 문짝은 나무판으로 중앙 열에 달았다.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운 뒤 위는 벽으로 마감했고, 아래는 마감하지 않은 채 외부와 통하게 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고, 문 위에는 벽을 두었다.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며, 궁 바깥 쪽 방향의 윗 문틀에 걸려있다.
창경궁 기타 건축의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빈양문 : 빈양문(賓陽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뒤편에 위치한 문으로 내전(內殿) 영역으로 진입하는 정문이다. 창경궁은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복구되었다. 빈양문은 창경궁을 복구할 때 지어져 액호(額號)가 정해진 문으로 추정된다. ‘빈양(賓陽)’ 뜻은 ‘밝음(陽)을 공경히 맞이한다(賓)’이다.
기록상 빈양문이 등장하는 시점이 1616년이기 때문이다. 빈양문은 창경궁의 내전인 통명전(通明殿),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등에서 공식적인 의례가 있을 때 왕대비전의 합문(閤門)으로 이용한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에 환경전이 빈전(殯殿)으로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발인 시 재궁(梓宮)이 명정전 월대로 나아갈 때 빈양문을 이용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의 난과 1830년(순조 30)에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기를 반복하면서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다가 철거되었는데, 현재의 문은 1986년 복원한 것이다. 빈양문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모르지만 기록에서 빈양문이 처음 등장하는 시점이 1616년(광해군 8년)인 것을 보아 이 무렵 진행했던 창경궁 중건 공사 때 처음 지은 듯하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불탄 것을 1633년(인조 11년)에 재건했다. 이후 주로 임금이 명정전으로 행차할 때 지나거나, 장례 때 망곡례를 행하고, 발인할 때 재궁(梓宮)이 나가는 공간으로 등장했다. 이외에 영조가 문과 식년시에서 뽑은 54명을 이곳에서 만난 기록이 있다. 그 후 1830년(순조 30년)에 다시 불탄 것을 3년 뒤에 복구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 때 같이 철거했다. 8.15 광복 후 문화재관리국에서 1984년에 발굴조사를 거쳐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빈양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가 높이 솟은 형태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문짝은 나무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장자리에 바로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본 기둥과 약간 간격을 두고 샛기둥을 세운 뒤 거기에 달았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은 조금 더 높게 만들어 신하들이 다니는 좌, 우 문(협칸)과 차이를 두었다. 협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는 나무판으로 마감했으며 어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 그리고 양 측면의 칸에는 중인방을 끼우고 나머지 공간을 역시 나무 판으로 막았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입혔다. 바닥엔 전돌을 깔았다. 명정전 뒷면에 가설된 툇마루까지 복도각을 연결하여 날씨에 상관없이 편하게 행차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복도는 문정전 뒷면까지 이어진다.
함인정 :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함인정(涵仁亭)은 명정전(明政殿) 서쪽에 위치하며 원래 인양전(仁陽殿) 터였고, 동쪽에는 빈양문(賓陽門)이 있다. 1633년(인조 11)에 인경궁(仁慶宮) 함인당(涵仁堂)을 헐고 여기에 옮겨 세우면서 그 호칭을 그대로 존속시켰다가 뒤에 이 이름으로 고쳤다.”라고 기록했다. 또 흠명전(欽明殿)이 함인정 근처에 있고 광해군 때 창건하여 계유년에 철거했다고 하나 상세하지 않다고 했다. 영조가 직접 지은 「함인정명병소서(涵仁亭銘幷小序)」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함인은 ‘해동(海東)의 만 가지[萬品]가 인의(仁義)에 흠뻑 젖는다.’는 의미이다. 함인정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인조 이전 창경궁에는 없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왕실 연회를 열던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 인양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인조 2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사라졌다. 저 때 통명전을 비롯한 창경궁 주요 건물 대부분이 같이 불탔다. 1633년(인조 11년)에 인조는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의 전각들을 철거 및 이전하여 창경궁을 재건했다. 이때 옛 인양전 터에 헐어온 인경궁 전각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함인정이다. 이때 어떤 건물로 함인정을 지었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궁궐지》에 적힌 내용은 '함인당을 헐고 옮겨 세우면서 그 호칭을 그대로 존속시켰다가 훗날 함인정으로 고쳤다'이다. 그러나 1633년 창경궁 복구 당시 작성한 《창경궁수리소의궤》에는 '함인정의 5칸은 경수전 후행각 5칸을 옮겨 짓고, 나머지 4칸은 새로 만들었다'라고 적혀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후대에 작성한 《궁궐지》보다는 아무래도 당대에 적은 《창경궁수리소의궤》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후 왕들은 함인정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주로 왕실 의례나 잔치, 또는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만나 경서를 읽는 곳으로 사용했다. 국상이 생겼을 때는 망곡하고 향을 올리는 곳으로도 이용했다. 참고로 함인정을 가장 많이 사용한 왕은 영조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영조실록》에 함인정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온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었지만, 함인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주변의 행각과 문은 없어지고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후 몇 번의 보수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함인정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층 목조 건물이다. 3단 짜리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3칸, 총 9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이익공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마루 위에 용두만 두고 잡상은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실내의 바닥은 전부 우물마루로 깔았다. 가운데 한 칸을 크게 하고 나머지 칸들을 툇마루처럼 만들었다. 높이 또한 가운데 칸이 다른 칸보다 높다. 가운데 칸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했으나, 나머지 주변 칸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칸의 도리 사방에는 사계절을 노래하는 시, 《사시(四時)》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중국 동진 ~ 송(육조) 시기의 시인 도연명이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여러 연구자들이 동진 시대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임을 밝혔다. 각 계절이 상징하는 방위에 맞춰서 봄 시는 동쪽, 여름 시는 남쪽, 가을 시는 서쪽, 겨울 시는 북쪽에 두었다. 현재는 사방이 트여있다. 하지만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한 〈동궐도〉를 보면,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창호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다. 1833년에 재건했을 때 바뀐 건지, 아니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지금처럼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위에 적었듯, 조선시대에는 함인정 주변에 행각과 담, 문이 있었다. 〈동궐도〉를 보면, 함인정 북쪽에는 벽돌과 돌로 만든 담이 있었고, 서쪽 담장에 2칸짜리 홍인문과 1칸짜리 작은 문이 있었다. 동쪽 담에도 1칸짜리 작은 문이 있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는 행각이 있었으며, 서쪽 행각에는 집서문과 풍순헌이 있었다. 남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북쪽에는 공묵합이 있었다. 순종 때 만든 〈동궐도형〉의 모습은 〈동궐도〉와 크게 다르진 않으나, 풍순헌이 없는 등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다.
관덕정 : 창경궁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으로 정, 측면 1칸에 초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를 거행하던 장소에 1642년(인조 20년)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대온실(식물원) :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열대 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했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말 시작된 세계 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보고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춘당지 : 창경궁 후원에 있는 연못. 본래 이 곳은 국왕이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를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이었다. 이를 일제가 1909년에 없애고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일본식 정원을 만들었다. 광복 후에는 이 위를 떠다니는 케이블카가 개통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철거되었다. 1980년대 복원 당시 한국식 정원으로 개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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