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표 관광지인 창덕궁에 역사와 구조와 건축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창덕궁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일본군에 의해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창덕궁의 역사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 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정종 1년)에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移宮)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그러나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머물기 싫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兩闕體制)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태종은 창덕궁을 완공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1405년(태종 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등에서 열었다. 1405년(태종 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춘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한 이후에도 창덕궁 증축 공사를 계속 했다. 1412년(태종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을 완공한 후 1406년(태종 6년)부터 태종은 창덕궁의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지은데다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外殿) 역시 매우 조촐했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고작 3칸 규모였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안고 해야겠다."면서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 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를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했는데, 이 때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졌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은 창덕궁을 애용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 대에 인정진 및 그 일대를 다시 한 번 증개축했다. 또한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벌이면서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세조 대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 규모는 태종 때보다 규모가 3배 더 커졌다.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壽康宮)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선조가 한성을 떠나 파천하면서 궁을 버리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탔다. (주동자가 백성인지 왜군인지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1593년(선조 26년)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동 행궁에 기거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죽기 3년 전인 1605년(선조 38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즉위 후인 1609년(광해군 1년)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보수 공사를 명했으며, 1년 후인 1610년(광해군 2년)에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창덕궁을 법궁으로 선포했다. 이렇게 버려져있던 시기, 불 타 폐허가 된 창덕궁과 버려진 후원은 경희궁과 함께 범들이 낮 동안 몸을 은거하던 장소였다. 이에 창덕궁과 경희궁은 곧 재건되었으나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재건되지 못한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했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인조 치세의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1647년(인조 25년)에야 공사가 끝났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과 경희궁이 기존의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궁궐병이었지만, 재위 초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이들 궁전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점을 언급하며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재건까지는 왕실 이미지 복구를 위한 리모델링 사업 정도로 인정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쪽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인조가 인경궁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경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인조는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연루된 저주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든 인경궁을 써보자는 입장이었다.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정쟁이 있었지만, 1632년(인조 10년)에 소송대비가 엮인 저주사건이 터진 이후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지어놓은 궁전을 굳이 헐고 그 자재를 옮겨다 새로 짓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신들이 그냥 인경궁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렸다. 광해군 이후 창덕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 후기 대부분 정치적 사건의 배경이 창덕궁이었다. 한마디로 창덕궁은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이다. 그렇기에 조선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궁궐이기도 하다. 고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던 과거에는 경복궁에게 그 입지를 많이 빼앗겼지만. 순조 시절 대화재로 창덕궁 상당 부분이 다시 한 번 전소되었다. 불타기 전 창덕궁 건물 대부분은 인조가 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중건하면서 창덕궁은 정궁(법궁)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주하는 등 여전히 창덕궁을 중요한 궁으로 인식하고 활용했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당시에는 청군의 공격으로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1897년(건양 2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환궁한 후 대하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사용했으나,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39년 만에 도로 정궁이자 황궁이 되었다. 단순히 임금이 머문 것만을 기준으로 하면, 1894년(고종 31년) 이후 13년 만이다. 1910년(융희 4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했다. 전 황제였던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강등당했고, 창덕궁은 순종의 궁호로도 쓰였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에 공개했다.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다 재건하기도 했다. 의외로 덕수궁(경운궁), 경복궁 못지 않게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이다. 궐 내부에 덕수궁 석조전 같은 양관이 세워지지 않았을 뿐 서양 문물의 영향이 물들어 있다. 주요 전각들의 내부는 서양식 형태이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 격인 선정전, 생활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 내부에는 전구가 달려 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7년에는 미군정에서 몰수하여 정부 소유가 되었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 (문화재청)의 소유가 되었지만, 정부의 배려로 1960년대 이후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 등 구 황실 일족이 일부 전각(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했다. 그러다 1989년 4월에 이방자의 별세를 끝으로 완전히 구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여사, 덕혜옹주)들이 거주했다. 즉,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구 황족들의 거처 역할을 했다.
창덕궁의 구조와 건축물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창덕궁의 구조와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창덕궁은 궁문, 외조, 내조, 후원 그리고 낙선재 권역, 구 선원전 권역, 신 선원전 권역, 기타 권역으로 구분 된다. 창덕궁 궁문에는 돈화문, 금호문, 단봉문, 요금문, 경추문이 있다. 창덕궁 외조는 외전과 궐내 각사로 구분되고 외전에는 진선문, 숙장문, 인정문, 인정전, 선정전이 있고, 궐내 각사에는 이문원, 검서청, 봉모당, 책고, 예문관, 홍문관, 내의원, 억석루가 있다. 창덕궁의 내조는 내전과 동궁으로 구분되고 내전에는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이 있고, 동궁에는 성정각, 관물헌, 중희당의 터, 승화루 & 삼삼와, 칠분서가 있다. 창덕궁의 후원(비원이라 불리기도 함)은 부용지 일대, 연경당 권역, 옥류천 일대, 애련정 권역, 관람전 권역, 그 외로 구분된다. 부용지 일대에는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 서향각, 희우정, 천석정이 있다. 연경당 권역에는 연경당, 선향재, 농수정이 있고 옥류천 일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취규정, 취한정, 농산정이 있다. 애련정 권역에는 기오헌, 운경거, 애련정이 있고, 관람정 권역에는 관람정, 폄우사, 승재정, 존덕정이 있다. 그 외 건축물에는 가정당, 능허정, 청심정이 있다. 낙선재 권역에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있고, 구 선원전 권역에는 선원전, 진설청, 내찰당, 의풍각, 양지당, 영의사가 있으며, 신 선원전 권역에는 신 선원전, 의효전, 재실이 있다. 기타 권역에 건축물에는 빈청, 몽답정, 괘궁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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