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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창경궁의 역사와 건축

by 또바기벗 2023.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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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창경궁은 (昌慶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궁궐로 조선 성종(1483년) 때에 건축하였다.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또, 고려의 국새를 넘겨받은 수창궁(壽昌宮)의 청심정(淸心亭)과 동일한 이름의 정자를 가까이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 (東闕)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창궁(壽昌宮)과 매우 유사한 수강궁(壽康宮)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성종 14년(1483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숙종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정조가 승하한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박물관이 들어서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다.

창경궁의 역사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 한 뒤 거처한 궁)이 있던 곳이다. 이후 당존도 즉위 1년 차에는 누이의 사저에 살다가 이듬해에 수강궁으로 옮겼는데, 여기서 계유정난을 당했다. 성종 15년(1484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세 사람을 위하여 따로 지은 대비궁,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구별 지으려고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녕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즉위초부터 중수가 진행되어 왔는데, 정세가 어수선하여 일시 공사가 정지되었다가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왕이 정릉동 행궁에서 창덕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면서 신하들의 반대 속에 창덕궁 영건의 공사에 다시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에는 창덕궁의 부속 궁궐로 활용되었으므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렸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반정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환경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으며, 난이 진정된 후 1619년에 다시 중수되었다가 순조 때 화재로 다시 훼손되었다. 숙종 때에는 신사년의 변고와 신임년(신축년과 임인년)의 사화가 일어났다. 숙종은 장희빈을 총애하다가 장희빈이 숙종의 계비 민씨를 신사년 701년에 희빈을 처형하고 그의 일가를 숙청하였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궁내의 취선당에 거처하였다.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에는 왕세자의 즉위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다가 노론의 대신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동궁 처소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영조 때에는 사도세가 뒤주에 갇혀 죽는 사건이 창경궁에서 일어났다. 당시 세자가 갇힌 뒤주는 궁내 선인문 안뜰에 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1909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하였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창경원으로 전략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 훼손되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의 발굴, 복원 공사로 명정전, 문정전 일곽만이 복구되었다.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 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되었다.

창경궁의 건축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였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듯하다. 현재 창경궁에는 조선시대 건물로는 명정전(국보 제266호), 통명전(보물 제818호), 홍화문(보물 제384호), 숭문당·함인정·환경전·경춘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관덕정·월근문·선인문·명정문과 명정전 회랑(보물 제381호)이 있고, 석조물로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관천대(보물 제851호),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이 있다. 현 낙선재(樂善齊) 지역은 원래 창경궁에 소속되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경내에 있다. 창경궁의 정전이고 명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며,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규모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은 중심축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주변 행각도 이에 맞추어 약간 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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