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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창경궁 외조의 정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by 또바기벗 20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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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문>

창경궁 외조는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정전 권역과 편전 권역으로 나누어진다. 정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명정문과 명정전이 있다. 편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문정전과 숭문당이 있다. 이 글에서는 명정문과 명정전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설명하겠다.

창경궁 외조의 정전 권역 내 명정문의 역사와 구조

명정문 : 조선초기에는 왕위를 이어받은 왕과 대비가 함께 기거한 일이 없었다. 선왕이 승하하기 전에 대개는 자신의 아들인 다음 왕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어, 대비(大妃)의 위계에 오른 왕비와 함께 궁궐 밖에 따로 별궁을 정해 나가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했더라도 다시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성종 이전까지는 왕이 임어한 시어처(侍御處)에 대비가 함께 머문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성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실에는 갑자기 3명의 대비가 존재하였고 대비들이 거처할 만한, 위계에 맞는 전각을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이 지속되는 상황이 생겼다. 성종은 대비를 위한 새로운 궁궐을 모색하였고, 대비는 무릇 동조라는 이름으로 동쪽에 거해야 한다는 규례를 따라 창덕궁의 동쪽에 창경궁을 마련하였다. 이때 정전을 비롯하여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이 모두 동쪽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궁궐이 지어졌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와 옥천교를 건너면 바로 보인다.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있는 경복궁과 비슷하지만, 경복궁엔 중문이 있고, 창경궁엔 없는 것이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정궁인 반면, 창경궁은 애초 대비궁의 개념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당연히 ‘명정전의 문’이란 뜻이며, ‘명정(明政)’ 자체는 ‘정사(政)를 밝힌다(明)’는 뜻이다.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지었다.

명정문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명정문은 명정전의 권역으로 조정의 마당을 둘러싼 행각 중 동행각에 있는 문이다.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고, 100여 년이 지난 임진왜란 당시에 창경궁 대부분의 전각과 함께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중건 역사를 일으켜 복구하였다. 일제강점기가 되었을 때 창경궁은 궁궐로서는 겪지 말아야 할 수모를 겪었다. 왕실의 집이며 한 나라의 정사가 모이는 궁궐이건만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뀌며 궁궐의 면모를 잃어버린 놀이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창경원으로 이름 지은 이곳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가득 채워 심었고 식물원은 물론 동물원, 놀이기구들이 들어서며 대부분의 전각이 훼철되었다. 이때 명정문의 권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명정문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행각의 일부가 헐려 나갔다. 그나마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이 화를 피해 조선중기의 건축물을 보여준다. 1950년대에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았던 창경원이 다시 문을 열며 이 시기 서울시의 행락객들에게 인기 높은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86년부터 창경궁의 복원 계획을 마련하여 동물원, 장서각 등을 과천과 성남 등지로 이전하였고 이때부터 창경궁 내 주요 건물의 원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지금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정비된 명정문과 명정전의 일곽을 볼 수 있다. 다행히 명정문은 그간의 수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도 화를 면해 광해군 때 중건된 문이 그대로 보존되어 궁궐의 전문(殿門) 가운데 가장 오랜 연한을 간직한 문으로 보물 제385호로 지정되었다. 명정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며 겹처마 양식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 장대석으로 쌓은 4단의 기단에 7단의 계단 이 건물 전면에 설치되었다. 그 위에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했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 양식으로 했고 모든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2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 훨씬 높게 세웠다. 다른 궁궐과는 달리 협칸과 어칸의 너비 차이가 거의 없으나 어칸이 30cm 정도 더 길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고 합각머리 밑의 엮음을 쪽천장으로 가렸으며, 쪽천장의 얽음은 우물천장으로 했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했고, 문짝은 나무판으로 되어있으며 중앙 열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과 정전 명정전과 명목상으로는 일직선상에 있으나 실제로는 약간 축이 맞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설이 있으나 풍수지리와 연관 지어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창경궁 외조의 정전 권역 내 명정전의 역사와 구조

명정전 :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창경궁의 정전(正殿)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돌로 된 월대 위에 목조건물로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명정전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483년(성종 14년) 옛날 태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창건할 때 함께 지었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지었으며 상량문은 우부승지 김종직이 지었다.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이는 풍수지리 및 지형 문제에 근거해 배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명정전은 동쪽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명정전에서 열린 행사는 크게 중요한 국가행사보다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행사나 왕실의 잔치 등이었다. 명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인종이 유일하다. 창경궁에서 왕이 승하해도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창경궁은 창덕궁에 비해서 정치적 기능보다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이 컸던 탓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른다. 즉, 명정전은 현존하는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따라서 17세기 초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에 명정전을 가장 알뜰살뜰 사용한 임금은 영조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자 66세가 되던 1759년(영조 35년)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이곳 명정전에서 계비로 맞아들였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유흥 · 여가시설 창경원이 되면서 일제가 명정전 행각을 철거하고 박석을 걷어 벚나무를 심는 등 크게 훼손했다. 8.15 광복 후인 1963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보수했고, 1983년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환원되면서 관련 시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이후 복원, 수리 공사를 하여 1986년에 마무리했다. 명정전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 비해 굉장히 규모가 작은 편이다. 애당초 창경궁이 임금이 정식으로 머물 궁으로 지은 게 아니라 창덕궁에 딸린 대비궁으로 지은 것이라 그렇다. 층도 단층에 터 크기 자체도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보다 훨씬 작다. 또한 독립된 월대를 가진 다른 정전과 다르게 건물 뒤편에 바로 붙어있는 복도 1쌍만 지나면 바로 문정전, 숭문당, 빈양문 등 다른 건물 영역으로 연결될 정도이다. 석축기단 2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1층 전각이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포의 짜임새가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이 힘차고 예리한 점, 첨차에 풀무늬를 새긴 수법이 세련된 점, 주춧돌에서 공포까지의 지지체(支持體)와 그 위에 얹은 지붕의 균형이 잘 조화된 점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몇몇 학자들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 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1963년 합각머리 안쪽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의 내용이 일치하여, 광해군 때 재건한 것을 확인했다. 외곽을 둘러싸는 16개의 일반 기둥와 내부 전면(前面)에만 배치된 크고 아름다운 높은기둥 4개로 형성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 어칸에는 꽃처럼 창살을 만든 사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삼분합문, 그리고 툇칸에는 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고, 좌 · 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부는 회색벽돌로 12단 쌓아 화방벽(火防壁)으로 조성했다. 좌우 측면 중앙칸에는 삼분합문이 설치되었고, 좌·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단은 정면을 후면과 마찬가지로 회색벽돌로 12단 쌓았다. 분합문과 창 상부에는 모두 광창을 설치했으며,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부 중앙 뒤에 어좌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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