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은 서울시 종로, 창덕궁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17호로 지정되었다.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다고 한다. 원래 춘휘전이란 건물로 조선 효종 7년(1656) 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은 것으로,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 한다.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선원(璿源)'은 '왕실의 유구한 뿌리'이다. 《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을 옥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
창덕궁 구 선원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선원전 : 선원전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원래 선원전은 경복궁에 있었는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이후 1695년(숙종 21년)에 어진 제도를 새로 정비 및 재정립을 하면서 창덕궁에 선원전을 두어 100여 년 만에 부활하였다. 이때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1656년(효종 7년)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 짓고 이름을 바꿔 사용하던 별당 춘휘전(경덕궁에 있을 당시 이름은 경화당) 건물을 선원전으로 고쳐 활용하였다. 숙종을 시작으로 어진을 제작한 뒤 여기에 봉안하면서 건물도 증축하였다. 단, 철종의 어진은 선원전이 아닌 다른 곳에 모셨는데 아마 후임 왕 고종의 직계가 아니라서 그런 듯하다. 순조 시기에는 인정전의 화재로 근처에 있던 선원전의 어진을 임시로 주합루에 모신 적도 있었다.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중건 때 경복궁 내에 선원전을 지으면서 창덕궁 선원전의 어진을 경복궁으로 옮겼다. 이후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 땐 경복궁으로, 창덕궁에 머물 땐 창덕궁으로 어진도 따라 옮겼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부터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자 경운궁에도 선원전을 세웠다. 1900년 경운궁 선원전에 태조 이성계의 모사한 어진을 모시면서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의 어진을 모실 칸을 새로 짓게 하여 증축되었다. 그래서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까지 총 7점의 어진이 봉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순종이 일제의 압력으로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을 내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어진을 모두 이곳으로 옮겼다. 경술국치 이후 부속 건물들은 전부 헐렸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1921년에 덕수궁(경운궁)의 선원전을 옮겨다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 자리에 짓고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원래 선원전은 비었다. 이때부터 새로 생긴 선원전은 신 선원전, 기존의 선원전은 구 선원전으로 부른다. 이후 일제가 내부가 크게 훼손하였으며 1980년대 ~ 1990년대까지 궁 안의 주요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1985년 1월 8일 문화재관리국에서 보물 제817호로 지정하였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궐내각사 영역을 복원하면서 선원전과 부속 건물들은 옛 모습을 되찾았다. 선원전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4단으로 쌓은 장대석 기단 앞에 소맷돌이 없는 3칸 반짜리 계단을 앞면과 뒷면에 각각 3세트씩 놓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총 36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수서형의 이익공 양식이다. 보통 이익공 건물의 경우 기둥 사이에 화반을 놓고 거기에 운공을 놓아 주심도리를 받치는데 선원전 건물엔 운공이 없다. 기둥과 주춧돌은 전부 네모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6개의 잡상을 놓았다. 외벽의 경우, 정면 기준 양 툇간 부분은 벽으로 세웠으나 나머지 칸은 전부 띠살창의 4 분합문으로 설치하였다. 동, 서 양 측면의 경우, 툇간 부분 역시 띠살문이나 나머지는 전부 벽으로 마감하였다. 뒷면은(이하 방향은 뒷면에서 바라볼 때 기준), 왼쪽 툇간은 띠살문이지만, 오른쪽 툇간은 벽으로 막혀있으며 툇간에서 옆으로(왼쪽에서든 오른쪽에서든 마찬가지) 1. 3. 5, 7칸은 벽으로 막혀있고, 2, 4, 6칸은 띠살창의 4 분합문이다. 그리고 벽체로 되어있는 칸의 밑 부분은 습기 방지 차원에서 바람이 통할 수 있게 네모난 구멍을 만들었다. 내부는 전부 한 공간이며 바닥은 마루이다. 정면 기준 양 끝 가장자리 칸을 제외하고 가운데 7칸에 어진을 모시는 감실을 마련하였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천장은, 앞 뒤 툇간 부분은 서까래를 노출시켰으나 안쪽에는 봉황 문양을 장식한 우물반자를 놓았다.
진설청 : 진설청은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음식, 다과 등을 준비하고 차려놓는 작은 건물이다. 창덕궁 선원전의 진설청은 선원전 본채를 기준으로 동남, 서남, 서북쪽의 가장자리 칸 앞에 각각 1채씩 총 3채가 있었으며 선원전이 증축될 때마다 같이 옮겨졌다.
내찰당 : 동남쪽 진설청을 내찰당(內察堂)으로도 부른다. 긴 돌기둥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놓지 않은 굴도리 양식이다. 출입문은 북쪽으로 나있으며 선원전의 동남쪽 기단과 붙어 있다. 출입문을 제외한 나머지 외벽은 전부 창으로 꾸몄으며 창호는 띠살이다. 실내는 전부 마루이다.
의풍각 : 선원전 뒤편에 있는 부속 건물이다. 창고였는데, 주로 재궁 등 제사 용품을 보관하였다. 이름은 '의례(儀)가 풍성(豊)하다'는 뜻이다. 《동궐도》나 《동궐도형》에는 보이지 않고, 담장의 돌이 일본식 X자로 쌓여있는 것을 보아 일제강점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보관하였던 재궁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이방자 여사의 장례 때 사용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의민태자의 아들 이구의 장례 때 쓸 예정이었으나 유일한 재궁의 실물이라 다른 관을 사용하였다.
'ㄱ' 자 형태의 건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동북쪽 지붕은 팔작 형식으로 만들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 형태이고, 단청은 칠하지 않았다. 측면의 벽은 벽돌로 쌓았고, 문은 남향한 칸에 1개, 서향한 칸에 5개를 놓고 그 사이를 사고석 담장과 벽돌로 마감했다. 그리고 그 위에 창호를 바르지 않은 창을 두어 바람이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양지당 : 선원전의 부속 건물이다. 어진이나 어필 및 어의(御衣) 등의 보물을 보관하거나 왕이 선원전에 참배하기 전 잠시 머물던 공간이었다. 이름 '양지(養志)'는 '고상한 뜻(志)을 기른다(養)', '부모님 뜻(志)을 받든다(養)'는 2가지 의미가 있다.
원래는 1657년(효종 8년)에 왕대비 장렬왕후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작은 별당이었다. 그러다 숙종 시기 이 일대에 있던 춘휘전이 선원전으로 바뀌면서 선원전 영역에 속하였다. 양지당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4벌로 쌓은 장대석 위에 정면에 소맷돌 없는 4단짜리계단을 2세트 놓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그 측면에 붉은 칠을 한 판으로 풍판을 대었다.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으로 지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이다. 앞면의 반 칸은 툇마루를 놓고 정면 기준 서쪽의 2칸은 온돌방으로, 동쪽의 2칸은 대청을 두었다. 온돌방 쪽의 정면 외벽에는 문선과 중방을 낸 뒤 그 가운데에 창을 놓고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하였다. 서쪽 측면의 외벽에는, 툇간 쪽은 창문을 두고 중방 위에 벽을 두었으며 나머지는 전부 벽이다. 동쪽 측면의 외벽은 전부 창이며, 중방 위는 벽이다.
영의사 : 선원전의 재실 중 하나이다. '영의(永依)'는 '영원히 의지한다(永依)'이다. 여기서 의지할 대상은 선대 왕들이다. 영의사는 구조는 다음과 같다. 본채와 별채, 창고로 나뉜다. 본채를 먼저 보자.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였고 용마루에 용두만 올리고 나머지 지붕 장식은 하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남, 북 가장자리에 툇마루가 있고 가운데에 대청 3칸, 대청 양 옆에 온돌방을 각각 1칸씩 두었다. 측면은 중방을 두고 나머지 공간을 벽으로 마감하였다. 별채는 본채의 서쪽에 붙어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이외에는 본채와 기본 구조가 같다. 서쪽에 온돌방 2칸, 동쪽에 대청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고를 뺀 나머지 칸의 남쪽엔 툇마루가 놓여있다. 대청은 북쪽을 제외하고 창과 문이 없다. 그래서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창고는 별채의 서쪽에 붙어있다. 기본 구조는 별채와 같다. 2칸으로, 제일 서쪽 칸은 하단에 사고석과 벽돌을 쌓고 그 위를 벽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동쪽 칸의 경우, 중인방 위로 벽과 작은 창문을 내었고 중인방 밑은 바깥과 통하였다. 그리고 별채에서 창고 위로 올라갈 수 있게 계단을 설치했다. 그 계단의 몸체는 동쪽 칸 하단부에서 볼 수 있다. 본채와 별채의 툇마루는 서로 붙어있으며 벽이나 창문, 문이 없고 바깥과 통하여 현관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본채의 기단은 두 단이지만 별채의 기단은 한 단이기 때문에 본채가 별채보다 더 높이 있다. 창고는 별채와 기단 높이는 같지만, 별채보다 지붕이 낮은 모습이다.
창덕궁 신 선원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신 선원전 : 창덕궁 신 신원전에 속하는 정면 14칸, 측면 4칸의 규모를 한 전각 중 하나로 본래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 지낸 사당이었던 대보단(大報壇)과 북일영(北一營)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1년 2곳을 헐어내 새로 선원전을 세워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셨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소개했던 어진들이 대부분 불에 타는 사고를 겪어 전각 안은 비어 있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된 곳이 아니다.
의효전 : 원래 덕수궁에 있던 정,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순종황제의 첫 번째 아내 순명효황후 민씨의 위패를 모신 혼전(魂殿)이었으나 1920년경 창덕궁으로 이건 했다. 1928년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위패가 종묘에 합사 되어 의효전의 현판을 내렸는데, 이후 효(孝)가 비슷한 모양의 로(老)로 오독되면서 '의로전'으로 잘못 알려졌다가 2007년에 와서야 문헌 조사를 통해 정확한 실체가 확인되었다. 의효전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재실 :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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