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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by 또바기벗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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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전>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문정전과 숭문당이 있다. 문정전은 1483년(성종 14) 옛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을 조성할 때,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건물 조성이 완료된 1484년(성종 15)에 서저정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과 함께 문정전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창경궁은 대비들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궁궐의 규모가 비교적 작으며 격식을 갖추지 못한 부분이 있다. 특히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을 잇는 축이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동향을 하고 있는 반면, 정전과 맞닿은 편전인 문정전은 남향으로 축을 달리하고 있다.

원래 편전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나 실제 편전으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조선후기 계속해서 혼전이 설치되어 조선시대 왕실 상장례 공간으로 대표되는 전각이다. 숭문당은 숭문당이라는 이름은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 궁궐에서 왕이 경서를 논하는 건물의 이름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현재 숭문당으로 알려진 건물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의 형태로 장주초를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창덕궁에 숭문당이 있고 창경궁에도 숭문당이 있어 혼돈을 일으키기도 한다. 창경궁의 숭문당은 1616년(광해군 8)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창덕궁 희정당(熙政當)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왕이 학문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신하들을 만나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이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가까이 위치한 숭문당도 혼전과 연관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문정전의 역사와 구조

문정전의 역사 : 문정전은 명정전 남쪽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1483년(성종 14) 창경궁 조성 당시 편전으로 조성되었으나, 왕이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거나 경연하는 장소로 사용된 사례는 많지 않다. 성종 이후 연산군이 연회의 장소로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1517년(중종 12)에 궁궐 잔치 중 하나인 진풍정(進豐呈)을 설행하기도 하였다. 선조가 즉위하여 이곳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신하들을 만났으나, 1575년(선조 8)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혼전을 설치한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1595년(선조 28)에는 문정전에 도둑이 들어 어좌의 일월경(日月鏡)과 휘장을 가져갈 정도로 경비가 허술하고 잘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오랜 기간 편전으로 사용된 것은 인조 연간이다. 인조 연간에는 이괄의 난 등으로 창덕궁의 선정전이 소실되어 문정전이 잠시 편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인조는 이곳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의논했다. 그리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을 불러 술을 내리고 재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문정전이 혼전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1530년(중종 25) 성종비 정현왕후(貞賢王后)의 혼전인 효경전(孝敬殿)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7세기에는 혼전의 주 정전으로 활용되어 궁궐 안의 상장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530년(중종 25)에 성종비 정현왕후의 혼전을 문정전에 설치하였다. 이때 중종은 혼전에 제사 지낼 때 혼전의 뒤로 돌아서 가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광정문 안의 서편에 있는 명정전 남쪽 행랑에다 재실을 만들도록 하였다. 혼전에 국왕이 직접 제사 지낼 때에는 창덕궁 희정당에서 재숙(齋宿)하고 선화문(宣化門)으로 가서  소여(小輿)를 타고 광정문(光政門) 안에 있는 재실로 들어가 조금 머물러 있다가 제사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문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될 때에는 문정문 밖 명정전 남행각 춘추관을 어재실로 사용하였다. 또 문정문 밖 동남쪽에 배치되어 있던 도총부(都摠府)·주서청(注書廳)·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대간청(臺諫廳)·빈청(賓廳) 등의 궐내 관청을 안향청(安香廳)과 전사청(典祀廳) 및 제사에 올릴 음식을 만들기 위한 여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혼전으로 사용된 사례를 살펴보면, 1530년 정현왕후의 혼전인 효경전이 설치되었다. 인종 즉위년에는 중종의 혼전, 1575년(선조 8)에는 명종비 인순왕후의 혼전, 1578년(선조 11)에는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혼전이 설치되었다. 17세기에 들어 1649년(효종 즉위) 인조의 혼전인 영사전(永思殿),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혼전인 경모전(敬慕殿),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혼전인 경사전(敬思殿) 등이 설치되었다. 숙종 연간에는 1683년(숙종 9)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혼전인 영모전(永慕殿), 1688년(숙종 14) 인조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혼전인 효사전(孝思殿),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혼전인 경녕전(敬寧殿)이 설치되었다. 숙종의 혼전인 효녕전(孝寧殿)과 경종의 혼전인 경소전(敬昭殿)도 이곳에 설치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왕후(定順王后)는 정조의 혼전을 창덕궁 선정전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는 왕의 혼전이 선정전에 설치되었고 왕비의 혼전만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1843년(헌종 9) 효현왕후(孝顯王后)의 휘정전(徽定殿), 1860년(철종 11)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효정전(孝正殿), 1878년(고종 15) 철인왕후(哲仁王后)의 효휘전(孝徽殿) 등이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문정전을 중수(重修)하였다. 광해군은 문정전을 중수하면서 명정전과 같은 좌향인 동향으로 변경하여 조성하려 하였다. 또한 기존에 사각기둥을 사용하던 것을 원기둥으로 새로이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옛 제도와 같이 남향으로 사각기둥을 세워 중수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중종이 정현왕후의 혼전을 설행하던 시기부터 인조의 혼전을 설치하던 1649년(효종 즉위)까지 건축 공간은 다음과 같았다. 문정전은 의례 공간의 정전(正殿)이었고 문정전 문 밖에서 문정문까지 이어지는 제물 진설 행각은 7칸으로 설치하였다. 문정문 밖으로 제물 출입을 위한 행각을 마련하였고, 명정전 남행각에 어재실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혼전의 사용이 지속되면서 문정전 주변으로 건축 공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혼전을 설치하면서 문정전 동행각에 소대청(召對廳)이 설치되었다. 서편에 있던 숭문당은 왕실 내명부의 곡림청(哭臨廳)으로 사용하면서 숭문당과 문정전을 연결하는 통경문과 그 옆으로 내제물 진설처를 마련하였다. 이전에는 혼전 의례에 공식적으로 왕실 내명부의 참여 공간을 배려하지 않았으며, 내명부의 특별한 의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조의 국상 이후 인조비 장렬왕후가 인조의 혼전에 망곡 의례를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면서, 숭문당 앞마당에서 내명부의 망곡 의례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후 효종의 혼전을 설치할 때는 미리 내명부의 곡림 공간을 숭문당에 마련하였다. 내명부에서 마련한 제물을 진설해 둘 내제물 진설처는 숭문당과 문정전이 연결되는 통명문(通慶門) 옆에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명정문 남행각에 마련된 어재실에는춘추관(春秋館)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자주 혼전이 마련되면서 어재실로 정착하게 되었다. 영조는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인원왕후(仁元王后)의 혼전을 문정전에 설치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면서 어재실의 의미를 담아 「명정전남랑소지(明政殿南廊小識)」와 「재전기(齋殿記)」, 「재전흥회(齋殿興懷)」 등의 글을 남겼으며 친필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문정전이 혼전으로 자리 잡으면서 어재실로 사용된 춘추관 외에도 문정문 밖에 마련되었던 도총부와 승정원·홍문관 등의 여러 관청이 옮겨가게 되었다. 편전으로 사용될 당시 왕의 집무를 돕기 위해 가까이 설치되어 있던 관청이 점차 혼전의 부속 시설로 활용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정전은 건립 초기 편전으로 조성되었으나 1530년 이후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17세기에는 혼전의 주요 정전으로 장소성이 강해지면서 편전의 기능이 점점 약화되었다. 1781년(정조 5)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창덕궁과 경희궁에는 모두 선정전과 자정전 등의 편전이 있으나, 창경궁에는 편전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명정전을 편전으로 통용하여 왔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에는 문정전을 편전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16년(광해군 8)에 중건한 문정전은 대한제국기까지 존재했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명정전 정면 사진에 문정전의 동측면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정확한 기록 없이 사라지는데,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조성되는 과정에서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1983년 창경궁을 복원하며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1985년 발굴 조사를 시행하여 1986년에 문정전이 복원되었다. 

문정전의 구조 : 창경궁 자체가 원래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라 규모가 작기 때문에 문정전 또한 편전 치고는 작은 편이다. 보통 편전은 정전의 북쪽에 위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복궁 사정전 근정전의 정북방에, 창덕궁 선정전 인정전의 동북쪽에 있고 경희궁 자정전 역시 숭정전의 북쪽에 있다. 하다못해 편전이 따로 없는 덕수궁의 경우에도 편전 역할을 하던 여러 건물들이 (서편에 있든 동편에 있든)위도 상으로 중화전보다 북쪽에 위치해있는데 창경궁의 경우는 명정전의 바로 남쪽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정전들은 남향이지만 명정전은 동향이기 때문에 두 건물이 서로 토라져 등돌린 듯 마냥 틀어져 있다. 1530년(중종 25년)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의 혼전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혼전/빈전의 기능을 주로 맡아 사실상 편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이는 1781년(정조 5년)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창덕궁과 경희궁에는 모두 선정전 자정전 등의 편전이 있으나, 창경궁에는 편전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정전인)명정전을 편전으로 통용하여 왔다고 했다.’라는 대목에서 정조 시기에는 이미 문정전을 편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인식이 혼전으로 굳어지면서 문정전의 정문인 문정문 밖에 있던 도총부와 승정원 · 홍문관등의 여러 관청이 이전되었다. 임금의 업무를 돕기 위해 편전 근처에 있던 관청들인데 이 일대가 혼전의 부속 시설로 활용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이와 함께 정면에 새롭게 복도각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복도각은 혼령이 드나드는 길이란 의미를 갖는다. 복도각 역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고 1986년 문정전 본전이 복원 될 때 함께 지어지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른다. 참고로 <동궐도>를 보면 똑같은 기능이었던 창덕궁 선정전과 달리 복도각에 벽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명정전과 숭문당 사이에 작은 담이 있어 영역이 구분되었으나 일제 때 훼철된 이후 복원되지 못했다. 1단의 돌로 만든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1층 목조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삼출목, 외이출목에 다포 양식으로 지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바닥은 마루이기 때문에 주로 늦봄에서 초가을까지 사용했다. 제일 북쪽 중앙에 옥좌가 있으며 당가를 설치하여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다. 옥좌는 원래 경복궁 사정전처럼 단 위에 있어야하나 복원할 당시 재현하지 못했다.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숭문당의 역사와 구조

숭문당의 역사 : 1616년에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처음 조성되었다. 창덕궁의 희정당과 유사한 형태로 왕의 학문과 정치의 장소로 건립하였다. 창덕궁의 공식적인 편전은 선정전(宣政殿)이지만 희정당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신하를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점차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창경궁에도 공식적으로 편전의 건물은 문정전이지만 좀 더 편리하게 신하를 만나고 강론하는 장소로 숭문당을 사용하였다. 숭문당은 상장례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1528년(중종 23) 이후 계속해서 문정전은 혼전으로 사용되었고, 그 일대는 상장례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650년(효종 1)에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인조의 혼전에 망곡례를 행하고자 하는 의사를 나타냈다. 이전까지는 혼전 의례에 대비 이하 내명부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장렬왕후의 뜻에 따라 혼전과 내전이 연결되는 위치에 있던 숭문당의 마당에서 망곡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혼전이 문정전에 설치되었을 때에는 내명부가 숭문당에서 곡림(哭臨)하였다. 이후부터 조선후기에는 문정전에 혼전이 마련되면 그 서북쪽에 위치한 숭문당을 곡림청으로 사용하였다. 1671년(현종 12)에 숙경공주(淑敬公主)가 죽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숭문당에서 거애(擧哀)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자 명릉(明陵)에 장사 지내고, 능에 따라가지 못한 숙종은 창경궁의 숭문당에서 망곡례를 행했다.  1830년(순조 30) 환경전(歡慶殿)에서 시작된 화재로 인해 함인정(涵仁亭)·공묵합(恭默閤)·경춘전(景春殿)·영춘헌(迎春軒)·오행각(五行閣)·빈양문(賓陽門)과 함께 소실되었다. 1833년(순조 33)에 재건되었으며, 현재 창경궁에 남아 있다.

숭문당의 구조 : 창경궁 정전, 편전구역이 다른 궁궐에 비해 작은 편이라 명정전(정전), 문정전(공식 편전), 숭문당(일상 편전)이 다 가깝게 붙어있다. 명정전 뒤편으로 나있는 4칸의 복도를 거쳐 빈양문을 지나면 바로 숭문당이 나오며 문정전과도 담 문의 구분 없이 바로 뚫려있다. 그러나 《동궐도》를 보면 조선시대 당시에는 다른 건물 영역과 분리하는 담 문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때 헐려 지금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 있던 담과 문도 굉장히 작고 낮은 크기였기에 붙어있다는 표현이 틀린 건 아니다. 창경궁 중심축을 따라 동향했다.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정면(동쪽 면) 기준 앞면과 뒷면(서쪽 면), 남쪽 측면 가장자리의 바닥은 툇마루이다. 정면부 기단을 뒤로 물리고 대신 앞쪽의 1열을 돌 기둥으로 세워 누 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는 17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양식 중 하나로 꼽힌다. 뒷 부분은 평범하게 기단을 쌓고 주춧돌을 받쳤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고 용두와 취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놓지 않았다. 기둥은 네모나고 단청은 긋기단청을 하여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정면의 바깥 면엔 창문과, 문, 벽을 두지 않아 외부와 통해있다. 그리고 기둥 사이마다 난간을 설치했으며, 정면과 남쪽 측면이 만나는 툇마루 앞에 사다리를 놓아 통행할 수 있게 했다. 툇마루 안쪽에 벽과 문, 창을 설치했다. 각 칸의 바깥 면마다 중방을 놓았는데 정면 기준 왼쪽에서 3번째 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은 중방 위가 벽이다. 왼쪽에서 1번째 칸은 중방 아래를 띠살문으로 두었고, 2, 4번째 칸은 문선을 세운 뒤 창을 놓았으며 3번째 칸은 중방 위에 교창을, 아래를 띠살문으로 두었다. 남쪽 측면과 뒷면(서쪽 면)의 외부 역시 교창과 문인데, 문 창살의 경우 남쪽 측면의 동쪽 1칸만 띠살문이고 나머지는 전부 ‘정(井)’자 살이다. 뒷면의 2번째 칸(뒷면에서 봤을 때 기준)의 툇마루는 밖으로 통하게 만들어 출입이 가능하다. 북쪽 측면의 중방 아래는 문이나 위는 교창이 아닌 나무 판이며, 남쪽 측면과 마찬가지로 동쪽 1칸만 띠살이고 나머지는 ‘정(井)’자 살이다. 실내는 툇마루를 제외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온돌방 2칸 씩 총 4칸이 있으며 온돌방 사이에 대청을 두었다. 이렇게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을 둔 구조는 숭문당과 마찬가지로 일상 편전이었던 창덕궁 희정당, 경희궁 흥정당과 비슷하다. 대청에 '일감재자(日監在玆)'란 게판이 걸려있다. 사진을 보려면 여기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직역하면 '날(日)마다 보는 것(監)이 여기에(玆) 있다(在)'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걸었다고 한다. 숭문당 현판과 마찬가지로 영조가 직접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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