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는 창덕궁의 내조와 기타 권역 내 건축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창덕궁 내조는 내전과 동궁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배치도에 보이는 대로 내조는 희정당 주변으로 자리해 있다. 내조의 내전에는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이 있고 동궁에는 성정각, 관물헌, 중희당 터, 승화루와 삼삼와 그리고 칠분가 있다. 기타 권역에 건축물에는 빈청, 몽답정, 괘궁정이 있다.
창덕궁 내조의 건축물
창덕궁 내조는 내전과 동궁으로 구분된다. 창덕궁 내조의 내전은 다음과 같다.
희정당 :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11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전각이다. 본래 건립 당시에는 숭문당이라는 이름의 침전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희정당으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등의 병화로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 재건을 거치면서 선정전의 편전 기능을 이어 받았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 그 자재로 재건되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대조전 : 왕비의 침전으로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을 포함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경의실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에 내부가 일부 서양식 실내로 바뀌어졌다. 그 결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경훈각을 비롯한 전각들이 행각으로 연결되었다. 1926년 순종황제가 대조전의 부속 전각인 흥복헌에서 붕어했으며, 해방 후인 1985년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한 침대를 비롯한 근대 시기의 고가구들이 보관되어 있다.
경훈각 : 창덕궁의 전각으로 대조전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조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지만 본래 중층 전각으로 대조전과 이어져 있었다. 1461년(세조 7)에 2층을 징광루(澄光樓), 1층은 광세전(廣世殿)이라 불렀던 기록이 있었다. 후에 광세전은 지금의 명칭인 경훈각으로 개명되었다. 역시 1917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만경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 지금과 같은 모습의 단층 전각으로 재건되었다. 지금은 선정전만이 청기와를 쓴 유일한 건물이지만, 동궐도를 보면 징광루 역시 청기와를 사용한 건축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창덕궁의 내조의 동궁 내 건축물
성정각 : 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ㅓ"자 형태의 단층 전각이다. 액호인 성정은 유교 경전인 대학에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정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의 남쪽에는 희우루, 동쪽에는 보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으나, 1917년 창덕궁 대화재 당시 순종이 이곳으로 일시 피난처로 쓰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정각을 빙 돌아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 자시문(資始門)이란 문 앞에 오래된 홍매화 나무가 있는데, 명나라 사신이 선물로 준 매화나무에서 접쳐온 후 자랐다고 전해진다.
관물헌 :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각 뒤쪽에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여기에 걸린 '집희/즙희 (緝熙)'라는 편액은 고종이 12-3세 때 쓴 것이다. 왕의 편전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와 거주하기도 했다.
중희당 터 : 성정각을 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이 터가 정조 8년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동궁 중희당重熙堂이다. 정면 7칸 내지는 9칸, 측면 3칸 내지 4칸으로 추정되는 규모이며 문효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 동궁으로 쓰이기보다는 왕의 정무를 보는 편전이나 별당 용도로 많이 쓰였다. 중희당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당시 으뜸되는 정당正堂으로 사용했으며, 후일 헌종, 철종, 고종까지도 활발히 사용했다. 특히 고종 때는 명성황후와의 궁중가례절차를 중희당에서 치렀고, 기타의 궁중행사도 중희당에서 많이 개최했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80년경 경복궁 화재로 중건공사를 다시 벌이는 과정에 중희당을 경복궁으로 옮겨 지으라는 지시가 있었다라는 기록 이후에는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터로만 남아있다. 다만 중희당의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다.
승화루 & 삼삼와, 칠분서 :앞서 설명한 중희당의 부속건물들로 중희당의 본채는 없어졌으나 이 부속건물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동궐도에서 중희당 그림의 오른쪽 부분에 있는 건물들이다. 칠분서는 중희당에서 삼삼와/승화루로 넘어가는 연결복도였고 삼삼와는 육각정 형태의 건물이며, 승화루는 주로 도서를 소장하고 독서처로 쓰였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엔 순종의 경호를 명목으로 이곳 승화루에 '창덕궁경찰서'를 설치하고 일제의 경찰이 상주하기도 했다.삼삼와 앞 화단에 심겨있는 홍매화 나무가 일품이다.
창덕궁 기타 권역 내 건축물
괘궁정과 몽답정은 현재는 신선원전 권역 내에 있는 정자들이나, 건립 당시에는 창덕궁 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곳이므로 기타 권역에서 서술한다.
빈청 : 숙장문 너머 내전으로 향하는 길에 자리잡은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초익공 양식으로 지어졌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 등 고위관료 들이 왕을 알현하기 전에 잠시 머물면서 회의하던 장소였다. 이후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비변사가 폐지됨에 따라 비어버린 전각이 되었고 이후 한일합방 이후로 추정된 시기에 차고로 변용되었다. 해방 후 2001년 순종황제의 어차와 순정효황후의 어차를 보관, 전시했으나 2007년 어차들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진 후 카페로 활용되고 있어 일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몽답정 :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정자로, '꿈길을 밟고 간다'는 뜻이다. 신선원전이 세워지기 이전 북영의 부속건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돌기둥 위에 떠올려 있는 누정(樓亭) 형태이다.
괘궁정 : 정면, 측면 1칸의 정자로 '괘궁掛弓', 활을 걸어놓는다는 뜻으로, 신선원전이 세워지기 이전 북영의 군사들이 활을 쏘던 사정射亭으로 184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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