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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경복궁 내조 구역의 내전 권역과 빈전/혼전 권역 그리고 건청궁 권역과 이건 되어 잔존하는 건축물

by 또바기벗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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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야경>

이번에는 경복궁의 내조 구역 내 내전 권역과 빈전/혼전 권역 그리고 건청궁 권역에 속하는 건축물과 이건 되어 잔존하는

건축물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경복궁의 내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흥복전, 함화당과 집경당, 경회루, 하향정이 있고 빈전/혼전 권역에 속하는 건축물은 태원전이 있으면 건청궁 권역 내 건축물에는 장안당, 곤녕합, 집옥재, 향원정이 있다. 그리고 이건 되어 잔존하는 건축물에는 강녕전, 교태전, 만경전, 문경전, 만화당, 용문당, 융무당, 무량수각이 있다.

경복궁의 내조 내 내전 권역 건축물

흥복전 :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침전 건물이었으나 사신 접견 및 임금이 학문을 연마하는 경연과 양로연 장소로도 사용됐다. 대왕대비 조 씨가 1890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제 기능을 상실했다가 1917년 소실된 창덕궁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옮겨져 사라지고 해당 자리에는 일본식 정원이 들어섰다. 2015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시공업체가 복원 기준을 어기고 벽체와 지붕에 시멘트 20포대 분량을 섞은 재료를 쓴 사실이 드러나 2018년 4월부터 석 달간 재공사를 시행하여 2019년 복원을 완료하였고 단청은 2024년에 칠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냉난방, 전기 시설 등을 최초로 갖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함화당과 집경당 : 교태전 아미산의 북쪽에는 흥복전(興福殿), 광원당(廣元堂), 다경합(多慶閤),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永熏堂) 등의 여러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던 것을 2006년 함화당과 집경당을 연결하는 복도각과 주변의 행각만 복원해 2009년 1월 24일 일반에 개방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곳이자 궁중의 서화를 수장하던 공간이었다.

경회루 :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 조각을 새겼다고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0,000원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하향정 : 경회루 뒤에 있는 작은 정자인데, 원래는 경복궁에 없던 건물이다. 이승만대통령이 집권 시절 낚시와 휴식을 위해 만든 건물이다. 철거 논란이 있다.

경복궁의 내조 내 빈전/혼전 권역 건축물

태원전 : 흥성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 지은 전각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다. 남쪽에는 건숙문(建肅門)과 경안문(景安門)이 있고, 영사재(永思齋)가 태원전 오른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공묵재(恭默齋)가 있다. 태원전 서북쪽에는 간의당(簡儀堂)이 있고, 동서 양쪽에는 각각 세답방(洗踏房)이 있으며,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다. 명성황후 민 씨의 빈전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이 헐렸다가 2005년 복원되었다.

경복궁의 내조 내 건청궁 권역 건축물

장안당 :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곤녕합 : 명성황후 민 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뒤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집옥재 :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왼쪽은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은 협길당(協吉堂)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에 창덕궁 1888년(고종 25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물을 이건 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국풍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서재, 어진 봉안처, 외국 사절 접견소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30 경비단이 주둔하는 바람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6년에 수도 경비 사령부 30경비단이 부대 이전을 함으로써 이후 복원 작업을 실시하여 2006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향원정 : 건청궁 남쪽 연못의 섬에 있는 2층의 누각.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6.25 전쟁 때 불탄 후 1953년에 재건할 때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 있었으나 2020년 복원 공사를 통해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다. 현재는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국전 출품작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였다. 2017년 5월부터 전면 해체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년간 진행될 예정이며 헐거워진 목재 접합부, 토사가 쓸려내려 가 약해진 지반 지지력을 강화하고 다리를 원래 자리인 북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을 때 발전기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향원정에 발전기가 설치되었던 역사가 있다.

이건 되어 잔존하는 건축물

강녕전 : 1917년 11월에 창덕궁 희정당이 대화재로 소실되자, 1920년에 복원하면서 강녕전을 헐어다 세웠다. 강녕전 모습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원래는 없던 용마루를 시멘트로 올리고 트여 있던 툇간에 문을 달았으며, 창호지를 없애고 유리창을 끼우고 내부를 서양식으로 단장하는 등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교태전 :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대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원하기 위해 1920년에 이건 하였으며,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대청을 거실로 삼고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가 설치되었으며 원래 우물마루였던 대청 바닥이 쪽널마루로 바뀌는 등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만경전 :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자경전의 북쪽에 있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 중건할 때 자경전의 중소침으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대화재 이후 한동안 고종이 강녕전을 대신하는 정침으로 사용하였다. 신정왕후의 팔순 진찬례가 열리기도 했고,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할 때 경훈각으로 변하여 현재까지 창덕궁에 남아 있다.

문경전 : 왕이나 왕비의 장사를 마치고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혼전(魂殿)이었다. 고종초에 중건되어 1890년 신정왕후의 국장 때 신주를 모시는 용도로 사용했다. 서쪽에 붙어 있는 회안전(會安殿)과 함께 태원전의 부속 전각으로서 기능했다. 1904년 순명효황후의 국장을 치르면서 회안전과 함께 경운궁 선원전권역으로 이건 되어 이름이 의효전(懿孝殿)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창덕궁 신선원 전권역으로 다시 옮겨지면서 현재까지 창덕궁 의효전으로 남아 있다.

만화당 : 만경전 북쪽에 있던 건물로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이건되어 함녕전으로 남아있다.

용문당 : 원래 신무문 밖 후원지역에 있었으나 현재는 전라남도 영광군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옮겨져 있다. 이익공 형식의 공포에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하여 권위를 높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대청이 3칸이고 양 옆에 방이 있다. 단 차이가 있는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으며 하대(下臺)의 넓고 큰 계단 아래에 하마석(下馬石)이 있었다. 국왕이 직접 감독하는 문전시(文殿試)나 망배례(望拜禮), 계회(契會)나 연회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군영의 사열식을 열기도 했다.

융무당 : 융문당과 함께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옮겨져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 2칸, 좌우에 방이 1칸씩 있고 전·후퇴가 있는 구조이다. 공포는 물익공이고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했다. 전면에 넓은 월대가 있으나 건물의 규모와 월대 높이, 익공 형식 등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다. 무전시(武殿試)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국왕이 시사(試射)를 하거나 군사들의 연무(鍊武)를 행하기도 했다.

무량수각 : 일본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소재의 고토쿠인(高徳院)에 경복궁의 건물이라고 전해지는 간게츠도(観月堂)가 존재한다. 조선왕실에서 금융담보로 조선척식은행에 제공한 것을, 야마이치(山一) 증권의 설립자 스기노 기세가(杉野喜精)의 저택으로 옮겼다가 1924년 고도쿠인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신미년 봄 정학교(丁學敎)가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학교는 광화문 현판을 쓴 조선 후기의 명필로, 1871년경 현판을 썼으리라 추정된다. 무량수각이라는 이름 때문에 경복궁 내 명성황후의 원당(願堂)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북궐도형, 궁궐지, 경복궁배치도 등 관련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이고, 일각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월궁전(月宮殿)이라는 이름 역시 확인되지 않아 경복궁의 전각이 맞는지조차 확인이 어렵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전각인데 경복궁배치도 및 북궐도형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이러한 건물은 면복각(冕服閣), 수문장청(守門將廳), 문경전 재실(齋室) 등 몇 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전각들 위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는 시멘트와 유리창이 발라져 있어 훼손 및 변형이 심하다. 2010년 간게츠도를 한국으로 반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2022년 현재는 흐지부지되어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문화재청 경복궁 홈페이지를 안내합니다

https://www.royalpalace.go.kr/

 

문화재청 경복궁

 

www.royalpalac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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