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궁문과 외조 내 건축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창덕궁의 궁문은 돈화문, 금호문, 단봉문, 요금문, 경추문의 건축물이 있습니다. 외조는 외전과 궐내각사로 구분되고 외전에는 진선문, 숙장문, 인정문, 인정전, 선정전이 있습니다.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궐내각사에는 이문원, 검서청, 봉모당, 책고, 예문관, 홍문관, 내의원, 억설루가 있다.
창덕궁의 궁문 건축물
돈화문 : 창덕궁의 정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증충의 우진각지붕집이다.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년(태종 13)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선조 40)에 복구를 시작해 1609년(광해군 원년)에 완공해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본래는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법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다. 1997년 일제강점기에 파묻혔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돈화문 앞에 있던 월대를 복원했다.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라고 한다.
금호문 : 창덕궁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인 돈화문이 주로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이용되었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궁내 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창덕궁으로 들어올 때 금호문을 이용했다. 건립 이후 성종 이전까지 명칭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에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각기 2개의 액호를 지었고 이때 성종이 금호라는 액호를 낙점해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이 되었다.
단봉문 : 창덕궁의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는 남장문이라고 불렸으나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성종 때 개명된 것이며 당나라 장안성 대명궁의 남문인 단봉문에서 따왔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돈화문을 사사로이 드나들 수 없는 왕족과 그 친인척 그리고 상궁들의 전용문이었다.
요금문 :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한 궁문. 내시와 궁녀들이 병들거나 늙어 내관, 궁녀 생활을 마감하고 퇴궐시킬 때 나간 문이다. 현재는 근처에 주택들이 들어서 폐쇄된 상태며 근처 담장까지 가옥이나 상가의 담벼락으로 활용되고 있거나 문 앞에 쓰레기가 쌓이는 등의 수난을 겪고 있다.
경추문 : 금호문과 함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나 출정 명령을 받은 무관이 나오는 데에 이용되었다.
창덕궁 외조 내 건축물
창덕궁 외조 내 외전 건축물
진선문 :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 지붕을 하고 있으며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서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 공사 때 헐렸다가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착수 1999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숙장문 : 진선문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내전으로 통하는 문이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1475년(성종 6)에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 중 하나를 성종이 낙점하면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 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인정문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다가 광해군 즉위초 증건시 재건되었으나 1744년(영조 20)에 인접한 승정원에서 화재로 또 소실, 복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정문을 포함한 20여 칸의 월랑이 행각으로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991년에 배수로 보수 도중 발견된 석조기단과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의 모습인 월랑으로 1995년까지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인정전 : 창덕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전각이며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다.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해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즉위하면서 1908년(융희 2년) 창호를 황색으로 칠하고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천과 커튼 등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앞마당의 박석이 걷어지고 화초가 심어지는 등 대대적으로 훼손되었다. 해방 후 1985년 국보 225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 앞의 잔디를 걷어내고 박석을 다시 설치했다.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선정전 :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단층 양식의 다포계 팔각지붕을 한 전각으로 궁궐의 전각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하고 있다. (징광루도 청기와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1917년 소실) 건립 당시 조계청이었으나,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되었다. 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다가 1647년(인조 25), 광해군 때 청기와를 얹어 호화롭게 지은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헐어 재건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청기와를 얹고 있는 것. 이후 편전의 기능이 희정당과 중희당으로 넘어가자 빈전, 혼전 등 왕실장례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 변모되었고 복도각이 증설되었다. 근대화 시기에 인정전처럼 내부에 전기시설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에 복도각이 헐어지는 등의 훼손을 겪다가 해방 뒤인 1985년에 보물 제814호에 지정되었고 1997년에 복도각이 복원되었다.
창덕궁 외조 내 궐내각사 건축물
이문원 :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본래 오위도총부가 위치한 곳으로 규장각이란 편액 때문에 규장각으로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후원에 있는 주합루만으로는 많은 분량의 서책들을 감당할 수 없자 1781년(정조 5)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여 검서청, 책고, 봉모당과 함께 내각이라 불렸다. 정조 사후 기능이 도서관으로 영락하여 이름만 존재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라는 관청 자체가 혁파된 후 빈 전각으로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다른 궐내각사의 전각들과 헐렸으며 해방 후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검서청 : 규장각 오른쪽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각으로 규장각에 둔 관직인 검서관이 사관을 도와 서적의 교정과 서사일을 본 곳으로 역대 임금이 지은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면서 빈 전각이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다른 내각의 전각들과 함께 훼철되었다가 해방 후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되었다.
봉모당 : 규장각과 검서청 뒤쪽에 자리잡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역대 임금들의 어진과 유품인 보책과 인장들을 보관했다. 궐내각사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원래 부용정 뒷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던 건물이다. 1781년(정조 5) 많은 분량의 서책들과 유품들을 감당할 수 없자 따로 어제, 어필, 어화, 고명, 유고, 밀교 및 선보, 세보, 보감, 지장 등을 열무정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정조 사후 규장각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덩달아 약화되었고 1857년(철종 8) 규장각 이문원의 부속 전각인 지금의 자리인 대유재로 옮겨졌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었다가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어 전모과에서 관할했고 일제강점기인 1911년 전각을 헐어낸 뒤 일본식 전각을 세워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가 보관되었다. 해방 후 1968년 일본식 전각을 철거하고 서적은 창경궁서각으로 옮겨졌고 1991년에 옛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봉모당의 앞마당에 커다란 향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수령이 700년 이상으로 창덕궁의 창건 전부터 있던 유서가 깊은 나무이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강풍으로 치솟은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정도 꺾여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700년 된 향나무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책고 : 봉모당 뒤인 금천변에 위치한 전각으로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책을 보관하는 창고로 하나의 전각이 아닌 여러 전각으로 되어 있으며 봉모당 뒤쪽과 측면에 각각 한채 그리고 앞서 언급된 봉모당 뒤편의 책고 등 3개의 전각을 구성하고 있다.
예문관 :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제찬(制撰)과 사명(詞命 : 임금의 말이나 명령)에 관한 일을 관장했던 예문관(예조 산하)의 관사로, 국조오례에 의한 각종 궁중의식의 규율을 관장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도 있었다. 향실과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홍문관 :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본래 액호대로 옥당(玉堂)이라 불려야 하지만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홍문관의 관사였기에 홍문관으로도 불려진다.
내이원 : 정면 8칸, 측면 5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액호는 약방이지만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내의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궁중의 진료를 담당했다. 허나 1920년 창덕궁의 대화재로 궁궐 내의 전각들이 불에 타 일제에 의해 변형되면서 동궁이었던 성정각에 내의원이 기능을 빼기고 헐렸으나 1991년에 옛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억석루 :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구 선원전 앞과 내의원 뒷행각에 속해 있으며 액호인 억석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하고 있지만, 다른 의미로는 최초로 약초를 발견한 고대 중국의 신농씨를 기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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