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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창덕궁 후원 관람정 권역과 그 외 구역 건축물

by 또바기벗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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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지와 관람정)>

창덕궁 후원의 관람정 권역은 관람지와 관람정 주변에 있는 건축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 구역 건축물은 어느 권역에 속해있지 않은 건축물들이다. 이번 글에는 그 건축물들에 대해 소개한다.

창덕궁 후원 내 관람정 권역의 건축물

관람정 : '관람(觀纜)' 뜻은 '뱃놀이(纜)를 바라본다(觀)'는 이다. 원래 '람(纜)'은 닻줄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뱃놀이란 의미로 썼다.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1828년 ~ 1830년 사이에 그린 《동궐도》에는 안보이고 헌종 때 제작한 《궁궐지》에도 관련 기록 이 없는데, 1907년(융희 원년) ~ 1908년(융희 2년)에 만든 《동궐도형》에는 보인다. 그래서 고종 때 후원을 정비할 때인 1903년(광무 7년) 경 아니면 순종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1907년(융희 원년) 무렵에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수 이순우 연구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적어도 1901년(광무 5년)에는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인 버턴 홈스(Burton Holmes)가 1901년에 발간한 《The Burton Holmes Lectures》에 관람정 사진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1901년 이전에 지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아직까지는 정확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관람정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층 목조 건축물로 동향(東向)이다. 평면이 부챗꼴이다. 즉, 지붕, 마루, 기단이 전부 부채 모양이다. 그래서 건물 부재들이 곡선 형태이다. 한 단짜리 기단 위에 주춧돌을 올리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둥과 주춧돌은 원형이다. 연못과 맞닿는 부분에는 세로로 긴 돌기둥을 연못 바닥에 맞닿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치 연못에 발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처음 지붕 재질은 동판 비슷한 것이었는데, 순종 즉위 전후로 기와로 바꾼 듯 하다. 처마는 홑처마로,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으며 용마루 양 끄트머리에 용두를 올렸다. 공포 없는 민도리 양식이다. 주두는 원형이고 단청은 모로 단청으로 칠했다. 기둥 사이 틀에 낙양각을 설치했다. 현판은 동면에 걸려있다. 모양이 특이하다. 나뭇잎 모양을 한 초록색 판으로, 진짜 잎에 글씨를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글씨는 흰색이다. 각 기둥 하단부마다 난간을 설치했다. 다만, 건물로 들어가는 부분에는 기둥 양 옆에 짧게 난간을 두었다. 난간의 모양은 풍혈을 뚫은 궁판을 두고 그 위에 난간기둥과 돌란대를 둔 형태이다. 실내 천장은 구조가 다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바닥은 마루이다. 기둥의 바깥쪽에 주련을 걸었다.

폄우사 : '폄우(砭愚)' 뜻은 '어리석음(愚)에 돌침을 놓아 깨우치게 한다(砭)'이다. '왕이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우쳐 마음을 다잡으라'는 뜻이다. 특이하게 건물 이름이 일반적으로 붙는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이 아닌 '사(榭)'로 끝난다. '사(榭)'는 '높은 터에 지은 정자'란 뜻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전각 중 '사(榭)'를 사용하는 건물은 폄우사가 유일하다. 현재 현판은 1903년(광무 7년)에 창덕궁 후원의 감독직을 맡았던 동농 김가이 썼다. 폄우사는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다만, 1828년(순조 28년) ~ 1830년(순조 30년) 사이에 그린 《동궐도》에서 보이므로, 그 이전에 지은 듯하다. 이후 몇 번의 변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폄우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층 목조 거물로 남향(南向)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총 3칸이다. '一' 자형 건물이다. 《동궐도》를 보면, 폄우사 서남쪽으로 3칸짜리 건물이 있었고 담으로 폄우사와 붙어있어 '「' 자 형태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폄우사만 남았다. 순종 때인 1908년(융희 2년)에 만든 《동궐도형》에는 현재와 같은 모습인 것을 보아 그 이전에 바뀐 듯하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올리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의 윗에는 전돌을 깔았다. 기둥과 주춧돌은 사각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쪽 박공에 풍판을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로,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얹었다. 단청은 모로 단청으로 칠했다. 현판은 동쪽 끝 칸 남면 도리에 걸려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다. 정면(남면) 앞에는 쪽마루가 덧대어있고, 쪽마루 밑에는 나무기둥과 주춧돌이 있다. 서쪽부터 2칸은 온돌방이고, 동쪽 끝의 1칸은 대청이다. 그런데 현재는 온돌방 바닥에 마루가 깔려있다. 나중에 마루방으로 개조한 듯하나 바뀐 시기는 알 수 없다. 벽면의 모습은 칸마다 다르다. 제일 서쪽 끝 칸의 벽면의 형태가 특이하다. 칸 안에 샛기둥을 두고 그 양 옆의 모양을 다르게 했다. 샛기둥 서쪽 면은 전부 벽이지만, 동쪽 면은 문상방과 문선을 설치한 뒤 문선 안에 창을 두고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가운데 칸의 벽면 역시 서쪽 칸 샛기둥 동쪽 면과 같으나 벽면 전체에 대칭으로 만든 점이 다르다. 두 칸 남면 벽면의 하단부에는 머름을 두었다. 대청 칸의 남면과 동면은 벽과 문이 없이 트여있으며 난간을 둘렀다. 난간은 풍혈을 뚫은 궁판 위에 하엽동자 모양의 난간기둥과 돌란대를 둔 모습이다. 단, 남면 난간의 경우는 사람이 출입할 수 있게 기둥 양 옆에 짧게 설치했다. 정면(남면)과 뒷면(북면)의 모습 역시 다르다. 가운데 칸의 경우는 정면과 뒷면의 모습이 같으나, 서쪽 끝 칸의 뒷면은 가운데에 샛기둥과 중인방을 '十' 자 모양으로 둔 뒤, 부재 사이를 전부 벽으로 마감한 형태이며 하단부에 머름도 없다. 동쪽 끝 대청 칸 뒷면은 가운데 칸 벽면과 같은 모습이다. 서쪽 측면은 중인방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문선과 창, 벽을 두고, 중인방 아래에는 벽과 붉은 나무 판문을 둔 형태이다. 실내 천장은 구조가 다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일반적으로 온돌방에는 벽지를 바르는데 폄우사 온돌방에는 바르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런 건지 아니면 나중에 마루방으로 개조하면서 뜯어낸 건지는 알 수 없다. 온돌방과 대청 사이에는 분합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정면과 동면, 뒷면 기둥에 주련을 걸었다.

승재정 : ‘승재(勝在)’ 뜻은 ‘빼어난 경치(勝)가 있다(在)’는 뜻이다. ‘승(勝)’은 원래 ‘이긴다’는 뜻으로, ‘(이겼으니) 뛰어나다’, ‘빼어나다’는 의미도 있다. 그 뜻을 확장하여 ‘아름답고 빼어난 경치나 고적’을 나타낼 때도 쓴다. 실실제로 높은 지대에 있어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가 최고라고 한다. 관람지 옆에 위치한 정자로 정, 측면 1칸으로 익공계 사모 지붕을 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지금의 자리에 초정이란 전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존덕정 : '존덕(尊德)' 뜻은 '덕(德)을 높이다(尊)'이다. 임금이 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훌륭한정치를 하라는 마음을 담았다.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렸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어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구성되고 보개 천정과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운데에는 황룡과 청룡이 장식되어 있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졌다. 정자 내에는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쓴 글귀가 남아있으며 이에는 모든 하천에 달이 뜨지만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고 그 달이 나니까 왕권은 지엄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창덕궁 후원 내 그 외로 구분되는 건축물

 

가정당 : 일제강점기인 1925년 6월 경에 지었다. 1925년 6월 27일 자 《시대일보》 기사에 따르면, "왕(순종)과 왕비(순정효황후)가 재미있게 소풍을 즐길 목적으로 이왕직에서 건축비 수만 원을 들여 창덕궁 후원에 세웠다"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매일신보〉 기사에는 "요사이 후원 높은 곳에 새로이 가정당이란 정자를 지었다."라고 적혀있다. 원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있었던 건물을 창덕궁으로 옮겼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고종실록》과 순종 때 제작한 듯한 〈경운궁중건배치도〉에서 경운궁 가정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정당 역시 한자 표기가 '嘉靖堂'으로, 창덕궁 가정당과 같다. 경운궁 가정당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 중건 공사를 할 때 지었으며 석어당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1904년(광무 8년)에 경운궁 대부분 건물들이 불에 탔음에도 무사했고, 고종의 장례 때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1928년에 경성부에서 발간한 《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에 실린 덕수궁 항공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름도 같고 창덕궁 가정당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 지 3년 후에 나온 자료에 덕수궁 가정당의 존재가 사라진 것을 볼 때, 충분히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가정당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기본 몸체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총 10칸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 우에 온돌방이 있다. 남향이다.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며, 합각은 벽돌로 마감했다. 지붕 끄트머리에는 용두를 올렸다. 1 고주 5량가 형태에 공포가 없는 굴도리집이다. 도리는 굴도리이며 소로가 온돌방 쪽 창방과 도리를 받쳐주는 형태이다. 대청 전면의 3칸짜리 툇마루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벽면에 모두 머름과 창을 달았으며 대청 툇마루 안쪽에는 분합문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장지문이 달려있는데, 가정당에는 없다. 그러니까 대청과 온돌방을 구분하는 문이 없다. 제일 아랫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을 2단으로 쌓았으며 기단 상부에는 전돌을 깔았다. 계단은 정면 기단에 3단짜리 3개와 좌우 기단에 각각 2단짜리 1개씩 놓았다. 온돌방 외벽의 하단부는 장초석이 기둥을 받치고 초석 사이에 벽돌로 방화벽을 만든 형태이다. 그러니까 기단과 방바닥이 바로 붙어있지 않다. 아궁이는 남쪽 기단 벽돌벽 가운데 하단에 있으며 굴뚝은 북측으로 15m 떨어진 곳에 있다. 건물 앞에는 잔디가 깔려있으며 서남쪽으로 20m 즈음 떨어진 곳에 한반도를 본떠 만든 연못이 있다. 현재는 물이 고여있지 않다. 이외에도 건물 주변으로 군데군데 괴석과 다양한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평상시에는 비공개 관람 구역이다.

능허정 : 후원에 위치한 정자 중 하나로 정,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91년(숙종 17)에 세워졌고 빽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외부와는 격리된 공간이다. 과거 "능허모설"이라 하여 능허정에서 눈 오는 저녁노을 즈음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청심정 : 후원에 위치한 정자 중 하나로 정, 측면 1칸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88년(숙종 14)에 천수정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청심정 앞에는 돌로 제작한 빙옥지(氷玉池)라는 이름의 장방형 연지가 있으며, 정자와 마주 보는 연지 위에 돌거북을 조각했다. "청심제월"이라 하여 청심정에서 보는 달과 구름(달무리)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현재 일반에 개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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