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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창덕궁 낙선재 권역 내 건축물의 의미와 역사 및 구조

by 또바기벗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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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창덕궁 내 낙선재 권역 건축물에 대해 알아보겠다. 낙선재 권역은 낙선재를 중심을 지어진 건물들을 지칭한다. 낙선재 권역에 속한 건축물로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있다. 건축물 이름의 의미와 역사 구조등에 대해 알아보겠다.

낙선재의 의미와 역사 및 구조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 헌종의 서재 겸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의민태자,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에 사망했다.

'낙선(樂善)' 뜻은 '선을 즐긴다' 이다. 《맹자》에 나온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樂善) 게으르지 않은 것(不倦)을 천작(天爵)이라고 한다.' 는 말에서 유래했다. 정면 쪽 툇마루 안쪽 오른쪽 칸에는 '보소당(寶蘇堂)'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헌종의 당호이기도 하며 '소식(蘇軾, 소동파)을 보배()처럼 여긴다' 는 뜻이다. 헌종이 소식을 많이 흠모했던 듯하다. 낙선재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이 지었다. 낙선재 영역 언저리엔 원래 동궁 중 하나인 낙선당이 있었는데, 1756년(영조 32년)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았다. 그 후 90여 년 뒤 비슷한 자리에 이름이 같은 낙선재와 그 주변 건물을 지었는데 낙선당의 복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만 딴 새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동궁에 살 세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건립 이유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 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경빈 김씨도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헌종은 낙선재에,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수강재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 승하했고 경빈 김씨는 궁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이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했다. 1907년(융희 1년) 황제 순종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 한 후엔 황태자였던 영친왕 일본에 볼모로 유학 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종이 이곳에 가끔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접견했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의 대화재 이후 내전을 재건할 때까지 여기서 거주했다. 순종 사망 직전에는 순종의 어진을 이 곳에 모시기도 했고# 순종 사후 한 달 뒤에는 대조전에 머물던 순정효황후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1929년 3월에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했다. 그렇게 20여 년 넘게 잘 살고 있었는데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는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 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며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임시로 머물렀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이후 1962년 덕혜옹주가, 1963년엔 의민태자(영친왕) 이방자 귀국하면서 낙선재 권역에서 순정효황후와 함께 살았다. 이때 낙선재 본채는 의민태자 - 이방자 부부가, 석복헌은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사용했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이방자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낙선재는 마지막 조선 왕족이 살았던 곳이 되었다. 근래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았으니 당연히 조선시대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1990년대 들어서 낙선재의 증축한 부분들을 철거하고 조선시대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2005년 7월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사망하자 빈소를 이곳에 설치하여 조선왕실 - 대한제국 황 최후의 빈소로 기록에 남았다. 2012년 3월에 문화재청에서 보물 제1764호로 지정했다.

낙선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기본 몸체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나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2칸 더 나있어 실제로는 15칸이다. 겹처마 양식 공포는 이익공, 지붕 은 팔작지붕이며 제일 아랫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 계단 3개를 조성했다. 누마루의 하단은 화강석을 길게 깎아 만든 주초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했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했으며 양반가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기에 잡상은 놓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서쪽 끝에 누마루가 정면 1칸, 측면 2칸의 2칸이 나있고 그 뒤로 온돌방이 있으며 마루와 온돌방 사이엔 둥근 모양으로 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차례로 대청 2칸, 온돌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창고가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놓여있다. 동쪽의 온돌방과 마루방 북쪽엔 위에 적었듯이 온돌방이 2칸 더 나있는데 《동궐도형》에 따르면 이 덧댄 온돌방을 통하여 석복헌과 실내로 연결되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특이하게 창호가 각 방마다 다른데 만(卍) 자 살, 아(亞) 자 살, 정(丁) 자 살을 비롯하여 당초무늬, 박쥐무니, 마름모고리무늬 등으로 상당히 개성 있고 아름답게 꾸몄다. 정면 동쪽 끝에는 작은 나무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서편에 또 다른 문이 있는데 양쪽 기둥을 전벽돌로 쌓고 거기에 판장문을 달았다. 이런 양식은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든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낙선재 뒤뜰의 화계를 볼 수 있다. 낙선재 동남쪽에 작은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행랑이 보이며 이 행랑에 난 문을 지나 좌측으로 들어가면 석복헌이 나온다. 건물 뒤편에 계단 정원인 화계가 있다. 풍광이 굉장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전돌로 쌓고 장식한 문 담장, 굴뚝, 괴석, 석지(石池) 등을 세웠다. 

석복헌의 역사 및 구조

석복헌은 창덕궁 낙선재 권역에 속하는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낙선재 권역의 안채 격으로 낙선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1846년(헌종 12)에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졌다. 헌종 사후 경빈 김씨 또한 사저로 돌아가면서 아무도 기거하지 않았으나 해방 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2월 3일 숨을 거둘 때까지 기거했다. 석복헌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장대석 기단 2단을 놓고 그 앞에 2단짜리 계단을 2개 놓은 뒤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뜰은 ‘ㅁ’ 자 형 평면으로 되어있으며 본채와 행랑채가 서로 붙어있고 동, 서 행랑채의 지붕은 각각 높이의 차이를 두어 층이 나있다. 서쪽엔 온돌방, 동쪽에 대청을 두었고, 대청 쪽 온돌방 앞의 한 칸은 툇마루를 두고 다른 온돌방 앞은 툇마루를 막아놓았다. 낙선재와 마찬가지로 난간 창호의 무늬가 제각기 다 다르다. 그래서 각 창문 문의 개성이 뚜렷하다.

 

수강재의 역사 및 구조

수강재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785년(정조 9년)에 처음 지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국 자경전을 지으면서 공사하고 남은 자갈 벽돌을 모아 가짜 산을 만들었는데 이를 철거하고 지은 것이 수강재이다. 원래는 임금 서재, 또는 세자가 공부하는 곳으로 지은 듯하며, 시기 효명세자 대리청정을 할 당시 이곳을 별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헌종 때 이 일대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낙선재 권역으로 편입시킨 뒤 고쳐지었고 이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머물렀다. 광복 이후 1962년에 일본에서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돌아온 뒤 1989년 4월 21일 서거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수강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낙선재보다 먼저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자세히 보면 다른 낙선재 권역의 건물과 다르게 당청을 칠했던 흔적이 보인다. 《동궐도》에도 단청을 입힌 모습으로 나온다. 다만, 현재는 너무 색이 바래서 쉽게 알아보긴 어렵다. 한단 반의 장대석 기단을 설치한 뒤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홑처마 양식 건물이다. 정면 6칸으로 동쪽에 대청을 두고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제일 서쪽 칸은 창고로 조성했다. 서북쪽에 온돌방이 더 있으며 이 서북쪽 온돌방을 통해 복도를 거쳐 석복헌으로 갈 수 있다. 제일 동쪽 칸은 행랑채와 통한다. 정면에서 볼 때 기준으로, 대청 쪽 온돌방은 툇마루를 밖으로 내었으나 다른 온돌방은 툇마루를 막아놓고 창을 세웠다. 창호는 낙선재, 석복헌과 달리 단순한 정(井)자 살과 띠살 창호로 꾸몄다. 수강재 동쪽에는 서향(西向)한 2채의 창고가 있다. 각각 지붕의 모양이 다르다. 한 채는 팔작지붕 형태이고, 다른 한 채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그 북쪽엔 넓은 뜰이 있다. 그곳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궁궐 지붕들이 보이는데 바로 창경국의 건물들이다.

 

상량정 : 창덕궁 낙선재 권역에 속하는 누각으로 낙선재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가 그리 크지 않는 육모정으로, 궁궐의 소규모 정자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화려한 편이다. 건립 연대는 불명이지만 1820년과 190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지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는 평원루(平遠樓)라고 불렸다. 이 상량정 곁에 있는 꽃담과 만월문이 경복궁 교태전과 자경전 꽃담과 나란히 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문을 나서면 아름드리 자란 돌배나무가 있는데, 한껏 꽃이 필 때 또한 일품이다.

한정당 : 상량정 동쪽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외관은 전통 한옥의 별당처럼 보이지만 문은 창호지가 아닌 유리로 마감했으며 기단 바닥은 타일을 깔아놓은 점이 특징이다.

취운정 : 수강재 북쪽 화계 위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86년(숙종 12)에 세워져 낙선재 일대에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현재는 편액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기록을 통해 취운정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정자들과 달리 한겨울에도 이용이 가능하도록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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