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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한국 관광지 100선 - 12 수도권 지역 <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 >

by 또바기벗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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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스토리 워크 지도 일부 >

 강화읍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를 직접 걸으며 강화의 역사, 산업, 종교를 한눈에 만날 수 있는 강화 스토리워크는 강화 역사만이 아닌 대한민국 근대사와 연결돼 있기에 더욱 의미 있는 곳이다. 강화의 전성기를 느낄 수 있는 심도직물(터), 한옥으로 지어진 가장 오래된 교회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을 기념한 강화 3.1 독립만세 기념비, 한국 천주교의 노동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을 기념한 노독사목 표지석, 고려시대부터 강화읍의 한켠을 지키고 있는 700년 은행나무, 강화 직물 이야기를 소개한 이화견직 담장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 공장이었던 조양방직, 강화의 독립운동의 현장인 강화중앙교회, 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 강화의 전통이었던 직조산업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소창체험관까지 이어진다. 친환경 전기자전거를 타고 고려궁지 등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여행상품도 운영 중이다.

심도직물(터)

 1959년 편찬된 『경기사전』에 따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이었다. 60년대 이후 강화군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운영을 맡아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는 대규모 업체로 발전하였다. 당시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고 한다. 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바로 [심도직물_노조투쟁사건]이다.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에 따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당시 천주교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종교계가 성명을 내놓음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고 해고자들은 복직되었다. 이 사건은 국내 종파를 막론하고 종교계에서 노동자 인권과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연대한 사건으로 남아있다는데 의미가 깊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한 사건이다. 옛 심도직물 공장이 있던 자리에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강화 주민들과 가톨릭교구에서 심도직물을 기억하고자 세웠다. 조형물에는“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성경 말씀을 새겼다. 조형물 앞에 놓인 표석에는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이며 “1968년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던 심도직물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와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그 첫 발을 내디딘 곳”이라고 써 의미를 강조했다.

강화성당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성공회 성당으로, 바로 옆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강화읍성당이라고도 한다. 1900년에 지어진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 바실리카와 한옥이 결합되었다. 사적 제424호로 지정되었다. 1890년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찰스 존 코프 주교를 비롯한 성공회 신부들이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1897년 조선왕실 해군사관학교(통제영학당)의 영국인 교관 윌리엄 헨리 콜웰(William Henry Callwell) 대위로부터 땅 3천 평가량을 매입하여 선교본부를 강화성내로 이전하였다. 1900년 11월 15일 찰스 존 코프 주교에 의해 '성 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축성되었다. 겉은 한옥처럼 보이나 구조와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른다. 바실리카 성당을 한옥 재료로 만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 그리스도교 토착화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고려하여 목재는 수령 백년 이상의 백두산 정송을 조마가 신부[3]가 직접 신의주에서 구하여 뗏목으로 운반하여 왔고, 석재와 기와는 강화도 내에서 구하였다. 도목수는 경복궁 중수에 참여했던 도편수였고, 중국인 석공과 강화 지역의 교우들이 참여하여 1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그 당시로는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지붕에 십자가를 올린 모양새나, 한자 현판 등이 이국적이면서도 어색하지는 않은 묘한 분위기라 관광지로 많이 찾는 모양. 4칸 x10칸 건물로 전통 건물의 개념에서 본다면 상당히 큰 편이다. 반면 면적에 비하면 그리 높지는 않다.

노독사목 표지석

 심도직물 생산품이 국내외로 인기를 얻으면서 강화의 경제는 활기가 띄었지만 반면 어두운 면도 생겨났습니다. 노동력이 부족해진 회사는 어린 소녀들과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요구했으며 이에 천주교 강화성당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일어났고, 노동자와 직물회사 간에 ‘심도직물 사건(1965~1968년)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노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으로 가톨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표지석은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화견직 담장길

 197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강화읍의 직물 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심도직물, 조양방직, 평화직물과 함께 대표적인 직물공장으로 알려졌던 이화견직의 담장길에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스토리보드가 설치돼 있다. 각 스토리보드에는 당시 직물공장의 규모와 모습, 강화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상 등이 담겨 있다. 

조양방직

조양방직은 1933년 강화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방직공장이었다. 강화 직물산업의 하락세와 함께 조양방직 또한 문을 닫게 됐고, 단무지 공장과 젓갈공장이 되었다가 한동안 폐가로 방치됐다. 그리고 2018년. 1년이 넘는 보수기간을 거쳐 거대한 카페 겸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과거 골동품수집가였던 주인장의 손길 덕에 하나의 박물관을 연상케 할 정도. 뉴트로(Newtro)의 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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