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관광지

한국 관광지 100선 - 14 수도권지역 < 서촌마을 >

by 또바기벗 2023. 11. 5.
728x90
반응형

< 한옥과 현대신 건물이 공존하는 서촌마을 >

 서촌(西村)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지역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흔히 장의동(藏義洞, 壯義洞)이나 장동(壯洞), 우대[上垈]로 불렸으며, 2010년대 들어서는 세종마을(世宗―)로도 불리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의 거주지로 유명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문인과 예술인이 많이 자리 잡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경호와 경비 목적으로 여러 규제를 받아 쇠퇴하였으나,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촌의 명칭과 유래

 한성부 아래에는 현재의 구(區)에 해당하는 다섯 개의 부(部)가 있었다. 이 가운데 북부는 대략 지금의 사직로와 율곡로 북쪽 지역 중 창덕궁 서쪽 지역에, 서부는 세종대로 서쪽 지역 중 사직로 남쪽 지역에 해당하였다. 2000년대 들어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은 조선 시대 행정구역으로 대부분이 북부이고 일부만이 서부에 해당할 뿐이며, 당대에 이 지역을 서촌이라 불렀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북부는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으로 분리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북부 중 경복궁 서쪽 지역을 북촌과 구별되는 별도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서촌의 지명으로는 ‘장의동’과 ‘장동’이 널리 쓰였다. 장의동은 원래 창의문 안쪽, 청풍계 맞은편의 현재의 궁정동 일대를 부르던 지명으로,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서 보듯 서촌 전체를 일컫는 지명으로도 흔히 사용되었다. 서촌의 가장 남쪽인 적선동에 있던 추사 김정희가 살던 월성위궁(月城尉宮)도 장동에 있다고 표현되었다. 이 지명은 《조선왕조실록》에만 53차례 나올 뿐 아니라, 조선 시대의 한성부 지도에도 대다수 등장하고 있다. 그 밖에 서울의 내사산 가운데 서쪽 산인 인왕산을 서산(西山)이라고도 하였고, 옥류동천 일대 중인들의 시사(詩社)를 서사(西社) 혹은 서원(西園)이라고도 부르는 등 인왕산 동쪽을 한성의 서쪽으로 인식하는 일은 보편적이었다고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면 ‘우대’[上垈] 혹은 ‘상촌’(上村)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송석원시사의 시화첩인 《옥계청유첩》(1791?)의 서문에는 “경복궁 서쪽은 좁은 땅이다. 때문에 서리(胥吏)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함이 적다. (중략) 서남쪽에서 삼문(三門) 가까이 이르는 지역은 소민(小民)들이 작은 이익을 경영하기를 좋아하고 사대부들도 섞여 산다.”라고 하여, 경복궁 서쪽 지역과 도성의 서남쪽 지역을 별개의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안민영의 시조집 《금옥총부》(1885?)에서는 필운대를 중심으로 모인 박효관의 운애산방(雲崖山房)을 ‘우대(友臺) 소리’의 현장으로 언급하였다. 정교의 역사서인 《대한계년 사》(1910)에서는 우대가 경아전(京衙前)과 별감들이 사는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이 구성원은 《옥계청유첩》 서문에서 경복궁 서쪽 지역을 기록한 것과 일치한다. 1900년 10월 9일 황성신문 기사에는 서촌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대신 “상촌의 사람들은 말투가 공경스럽다”라고 하였다. 《개벽》 1924년 6월호에 김기전이 쓴 글에서는 조선 시대에는 중·후기로 갈수록 한양 내에서 신분과 직업에 따라 지역이 분화되어, 광통교 위쪽을 우대[上垈], 서소문 안쪽 지역을 서촌(西村)이라고 하였는데, 우대에는 이배(吏輩)와 고직(庫直)이, 서촌에는 소론 일파가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우대는 청계천의 상류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 서울 토박이인 조풍연은 우대가 원래는 인왕산 기슭 지역을 가리켰으나 구한말에 와 안국동, 송현동, 계동, 가회동, 재동, 화동 등 북촌 일대까지 포함하였다고 전한다. 대신 이 시기에는 정동과 서소문 일대를 서촌으로 불렀다. 1899년 11월 27일 독립신문 기사에는 “서촌에는 영, 미, 덕, 법, 아국 다섯 나라의 공사관이 있고”라고 하였다. 《개벽》 1924년 6월호의 글에서도 서촌은 서소문 일대를 부르는 명칭으로 쓰였다. 한편, 황학정 창건 당시 우궁수(右弓手)였던 성문영(成文永)은 《황학정기》(1928)에서 누상동 백호정(白虎亭), 필운동 등과정(登科亭), 옥인동 등룡정(登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삼청동 운룡정(雲龍亭)을 ‘서촌오처사정’(西村五處射亭)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의 서촌이라는 지명은 북촌에 속하는 삼청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영역을 설정한 기준이 불명확하다. 일 년 뒤 간행된 《조선의 궁술》(1929)에서는 이를 ‘우대오터’[上垈五處]라 부르고 있다. ‘세종마을’이라는 이름은 2011년, 김영종 제33대 종로구청장이 “현재의 경복궁 서쪽 지역 일대를 아우르는 명칭인 ‘서촌’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직접 붙인 이름이다. 이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준수방(俊秀坊)이 세종마을에 포함되는 통인동 일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마을이라는 이름은 널리 쓰이지 않는다.

서촌의 역사

 고려 시대에는 남경, 좌소(左蘇) 백악, 강화, 서경 등으로 천도가 시도되었다. 이 가운데 숙종과 고종 때에는 남경에 실제로 행궁을 지었다. 특히 숙종 때에는 노원, 도봉산 아래, 면악(面嶽) 남쪽인 현재의 경복궁 인근, 용산 등이 궁궐의 입지로 검토되었으나, 《태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할 때 행궁은 현재의 경복궁 신무문 일원에 건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경 행궁의 위치를 이렇게 비정(比定)할 때, 남경에 해당하는 영역은 서쪽으로는 인왕산, 동쪽으로는 북악산에서 송현으로 뻗어 나온 능선으로, 대체로 현재의 서촌과 삼청동천 서쪽 지역이다.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 바로 옆이라는 점 때문에 왕족이 많이 살았다. 조선 초기에는 태종, 무안대군, 세종, 효령대군, 안평대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경복궁 서쪽 지역에는 일반인은 거의 살지 않았고, 왕족의 주거지, 세력가들의 경승지,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관련된 관서, 그곳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주거지가 전부였다. 조선 중기에는 광해군이 이 지역에 인경궁과 자수궁 등 2개의 궁궐을 지었다. 인경궁은 금천교시장을 중심으로 서촌 남쪽에, 자수궁은 현재의 군인아파트를 중심으로 서촌 중북부에 지어졌다. 그러나 두 궁궐은 광해군의 몰락으로 버려졌다. 인경궁은 궁궐의 들머리에 있던 금천교 외에는 자취가 사라졌고, 자수궁은 후궁과 여승들의 거처로 바뀌었다. 인경궁의 집터가 작은 집들로 쪼개지면서, 일반 백성들이 사는 작은 집들이 서촌 일대에 들어섰다. 서촌의 북쪽 지역에는 여전히 사대부들이 살았는데, 특히 대대로 장동에 살았던 신 안동 김씨(일명 장동 김씨) 김상용, 김상헌 형제와 그 후손들에서는 무려 15명의 정승이 나왔다. 장동 김씨 가운데 정승을 지낸 사람은 김상용과 그 후손인 김이교, 김상헌과 그 후손인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 김이소, 김달순, 김좌근, 김홍근, 김흥근, 김병시, 김병덕, 김병국, 김병학이었다. 이것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한 집안에서 낸 최다 정승이다. 그리고 김조순 이후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장동 김씨들은 60년가량 조선의 조정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장동은 서인과 노론에게는 본거지, 반대파인 남인에게는 서인과 노론의 소굴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영조가 서촌 남쪽의 창의궁에서 자랐는데, 이 곳은 금천교 바로 앞이어서 인경궁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 관서에 근무하는 서리(書吏)나 경아전(京衙前)들이 모여 살면서 위항 문학 운동을 펼쳤다.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는 서촌과 북촌, 세종대로 일대를 이르는 지명으로 ‘우대’(웃대, 상촌)가 사용되기도 하였고, 비로소 이 일대를 ‘서촌’이라고 부른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하였다. 친일파인 이완용과 윤덕영은 서촌에 넓은 토지를 소유하였고, 살 집을 짓기도 하였다. 1920년대 이후에는 경복궁 안팎으로 서촌 일대에 통치기구에서 일하는 관사(官舍)가 세워졌고, 일부는 지금까지도 적산가옥으로 남아 있다. 청계천 남쪽에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자, 정세권은 북촌과 더불어 사직동, 체부동, 통의동 일대에 조선인을 위한 한옥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는 일제가 장동 지역에 붙인 지명인 효자동이 서촌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도 서촌의 행정동은 북부와 중부의 청운효자동과 남부의 사직동 등 2개이다. 법정동은 15개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먼저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된 북촌에 대응해 '서촌'(西村)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서촌'이라는 이름은 2007년 김한배의 논문 '서울 서촌 역사문화탐방로 조성방안 연구'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서촌주거공간연구회 등 주민단체가 생기고 이 지역 가게들이 '서촌'을 자신들의 상호에 널리 사용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