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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지

서울의 대표 관광지 경복궁의 역사와 건축물

by 또바기벗 202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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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울의 대표 관광지인 경복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문 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근정전 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경복궁의 역사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

- 전각 확대와 1553년 화재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경회루는 1474년 보수되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靑瓦)가 올라간다.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명,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1592년 선조 때에 임진왜란으로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 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고자 경복궁·창덕궁·창경국의 궁궐을 난민들이 불태웠다는 것이 실록의 기록인데, 이에 관해 논란이 있다. 이기의 《송와잡설》과 류성룡의 《서애집》 등에서도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는 내용의 기록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조선 백성들이 방화의 주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이는 목격담이 아니라 전해 들은 것으로, 이들이 실제로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에 기록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인해 조선 백성들이 경복궁을 전소시킨 것은 아니었다는 설이 제기된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후의 왕들은 대부분 창덕궁에서 정무를 본다.

- 흥선대원군의 중건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 4월 26일(고종 2년 음력4월2일) 고종 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같은 해 5월 7일(음력 4월 13일) 공역이 시작되어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移御)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는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1895년 을미사변),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이 시기 경복궁은 비록 왕이 머무르는 거처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관리되었다.

-일제강점기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노승준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경성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1918년부터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총독부 청사 신축을 두고 조선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27년 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년 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

- 광복이후

1950년대에 대통령 이승만의 낚시터로 경회루 북서쪽에 조선시대 기법의 목조건물 하향정(荷香亭)을 설치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출동한 30사단 1개 대대병력이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로 명칭을 바꾼 뒤 태원전 권역에 머물렀다. 30경비대대는 주둔 후 천막막사를 사용하였으나, 1965년 경복궁 서북쪽 일대에 간이건물 20동과 콘크리트 블록 5동 등 반영구막사를 건설했으며 30경비대대 구조물은 1996년 철수까지 이용되었다.1963년  1월21일 경복궁 일대를 사적 제117호로 지정 보호하였으나, 그 해 10월 문화재관리국이 한 해 3백만원의 입장료 수입으로는 현상유지도 힘들다며 경회루 동쪽 약 7천평의 잔디밭을 헐어 골프장과 휴게시설·식당·주점·잡화점 등의 신축 계획을 발표했고 이는 여론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66년1월8일 정부는 선원전 영역에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한 건물 외형을 조건으로 하는 국립종합박물관 현상설계를 공고했다. 같은 해 착공하여 1972년 완공했으나 고종 2년(1865년) 건립돼 해방 이후에도 남아있던 건물인 경안당, 대향당, 정훈당(동당) 등 9동 106칸의 전각을 철거했다. 1970년 5층 철근콘크리트조로 제2별관을 건설하였으며 후에 문화재연구소로 활용되다 2004년 철거되었다. 1979년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후생관을 완공하였고, 문화재관리국청사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구 로 이전하면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궁중유물전시관을 옮겨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82년에는 '역사상 수난의 현장에 대한 교육시설계획' 방침에 따라 건청궁 영역에 한식목조건물로 을미사변기록화전시각(2007년 건청궁 복원 시 철거)을 설치했다. 광화문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63년에 원래 위치쪽에다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다.

 

경복궁 내 건축물

경복궁 내에는 다양한 건물이 있다. 왕뿐만 아니라 왕비 그리고 내시, 궁녀 등등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그 구역을 나눠 놓았기 때문에 다양한 건축물이 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경복궁은 크게 궁성, 외조, 내조 이외 이건되어 잔존하는 건축물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궁성에는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다. 외조는 3가지 권역으로 구분되며 정전 권역, 편전 권역, 궐내각사 권역으로 구분이 된다. 정전 권역에는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근정문, 근정전이 있고, 편전 권역에는 사정전, 만춘전, 천주전이 있다. 그리고 궐내각사 권역에는 수정전이 있다. 내조에는 침전 권역, 연침 권역, 동궁 권역, 내전 권역, 빈전/혼전 권역, 건청궁 권역으로 6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침전 권역에는 강년전, 연생전, 경성전, 연길당, 응지당, 교태전, 아미산, 흠경각, 함원전, 소주방이 있다. 연침 권역에는 자경전, 자경전 꽃담, 자경전 십장생 굴뚝, 제수합이 있다. 동궁 권역에는 자선당, 비현각이 있다. 내전 권역에는 흥복전, 함화당과 집경당, 경회루, 하향정이 있다. 빈전/혼전 권역에는 태원전이 있고, 건청궁 권역에는 장안당, 곤녕합, 집옥재, 향원정이 있다. 이전되어 잔존하는 건축물에는 강년전, 교태전, 만경전, 문경전, 만화당, 융문당, 융무당, 무략수각이 있다. 각각의 건축물에 대해 설명은 다음 글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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