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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내조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2] 통명전은 창경궁의 침전이다. 사실 창경궁은 대비 등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어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통명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주로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한 듯하다.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서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전(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그리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2023. 6. 14.
창경궁 내조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1] 창경궁 내조 영역 내 건축물로는 경춘전, 환경전,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집복헌이 있다. 경춘전은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경춘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 등을 볼 때, 대체적으로는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된 듯하다. 이름은 성종 시기 창건할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 2023. 6. 13.
한국 음식 김밥의 역사와 종류 김밥(Gimbap, Seaweed roll)은 밥을 김으로 감싸 둥글게 만 뒤 잘라낸 음식으로, 오늘날 한국에서는 넓은 의미의 분식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긴 김밥을 만들어 토막 내어 나눠 먹으나, 충무 김밥과 같이 그냥 한 번에 먹는 종류도 있다. 일본의 노리마카(김초밥)가 한국에 현지화 된 음식으로, 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속재료를 넣고, 식초 대신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하는 방식으로 현지화되어 초밥의 형태를 벗어났다. 처음엔 일제강점기 때 한국으로 전파된 것에서 시작했으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수십 년간 한국식 변형을 거치고 재탄생하여 상당히 대중적인 한식이 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김밥이 개발되었다. 주먹밥처럼 이동할 때나 빠르게 먹기가 편하여 소풍이나 여행, 이동할 때 즐겨 먹는다. 한국 .. 2023. 6. 12.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창경궁 외조의 편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문정전과 숭문당이 있다. 문정전은 1483년(성종 14) 옛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을 조성할 때,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건물 조성이 완료된 1484년(성종 15)에 서저정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과 함께 문정전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창경궁은 대비들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궁궐의 규모가 비교적 작으며 격식을 갖추지 못한 부분이 있다. 특히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을 잇는 축이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동향을 하고 있는 반면, 정전과 맞닿은 편전인 문정전은 남향으로 축을 달리하고 있다. 원래 편전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나 실제 편전으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조선후기 계속해서 혼전이 설치되어 .. 2023. 6. 11.
창경궁 외조의 정전 권역 내 건축물의 역사와 구조 창경궁 외조는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정전 권역과 편전 권역으로 나누어진다. 정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명정문과 명정전이 있다. 편전 권역 내 건축물에는 문정전과 숭문당이 있다. 이 글에서는 명정문과 명정전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설명하겠다. 창경궁 외조의 정전 권역 내 명정문의 역사와 구조 명정문 : 조선초기에는 왕위를 이어받은 왕과 대비가 함께 기거한 일이 없었다. 선왕이 승하하기 전에 대개는 자신의 아들인 다음 왕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어, 대비(大妃)의 위계에 오른 왕비와 함께 궁궐 밖에 따로 별궁을 정해 나가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했더라도 다시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성종 이전까지는 왕이 임어한 시어처(侍御處)에 대비가 함께 머문 경우는 .. 20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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